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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Feb 05. 2024

기타와 굳은살

   낡은 기타 하나가 집안에 우두커니 서 있다. 대학 입학시험을 마치고 기타를 배우던 아들이 두고 간 것이었다. 매일 봐서 그랬는지 아니면 막내아들이 뚱땅거려 그런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기타 학원을 검색했다. 마침 딱 마음에 드는 곳이 있었다. 짧은 전화 상담 뒤 약속한 첫 수업 날, 두근거리는 마음을 눌러 앉히고 학원에 들어섰다. 홍대 앞에서 기타와 함께 젊음을 보낸 뒤 외국에서 재즈기타와 작곡을 전공하고 고향에 내려와 자신의 음악 왕국을 만든 마흔 중반의 그.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에 내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기타 줄 위에 얹혀 있었다. 

   도레미. 손끝이 저릿저릿해졌지만, 파솔라시도까지 기타 줄을 튕겨 나갔다. 첫술에 배부른 일 없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닌가. 익숙지 않은 기타 줄에 손가락 아프다고 그만두면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을 테니 계속 쳐 나갈밖에. 

   나는 음치에다 박치지만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이나 악기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그래서 십수 년 전 월급쟁이 시절, 점심 끼니를 건너뛰고 클라리넷을 몇 년이나 배웠다. 그렇지만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예술이란 게 타고난 재질이 우선이겠지만 매일매일 연습을 통해 기량을 유지하고 올려야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레슨 받고, 방음 시설이 없단 핑계로 허송세월하다 다음 레슨에 간들 진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 끝에 예술을 멀리하고 지내다 아들의 빈자리에 찾아온 또 다른 악기, 기타가 좋아지고 있다. 

   겨우 두 번의 레슨을 지나왔다. 다행인 건 방음 장치 없이도 작은 소리로 연습할 수 있어 이 주 동안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연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리듬감 있는 울림에 콧노래가 절로 나는 건 덤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모든 일엔 빛과 그림자가 있듯, 시간이 갈수록 왼손가락 끝마디가 아리다가 굳은살이 만져지기 시작했다. 기타 연습하느라 단단해진 손가락 마디 끝을 보니 한때 내 곁에 영광의 상처였던 굳은살이 떠올랐다. 지금은 만져보아도 반들반들한 오른손 셋째 손가락 끝마디. 수학 경시대회 문제 푸느라, 기말고사며 모의고사 시험 준비하느라 힘껏 쥐었던 볼펜이 새겨준 시간의 자국들. 

   ‘굳은살’의 사전적 의미는 ‘잦은 마찰로 손바닥이나 발바닥에 생긴 두껍고 단단한 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예전 그 손가락의 굳은살은 그냥 단단한 살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열정이 내게 씌워준 일종의 월계관이었을 것이다. 이주 전 새로 시작한 기타는 얼마나 지나야 아니 얼마의 시간이 쌓여야 영광스러운 굳은살을 허락할까?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역호(不亦說乎)?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란 유명한 구절이 있다. 배우는(學)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배운 것을 익혀(習)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기쁘다는 것이다. 

   1968년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그의 저서 <단절의 시대>에서 지식근로자( Knowledge workers)를 처음 언급하였다. 학습과 지식습득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노동자. 어찌 보면 나도 지식근로자로 이십여 년 이상을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해가 다르게 발전하는 최신 지식을 일 년에 서너 번 참석하는 학술대회만으로는 따라잡기 벅찰 지경이다. 지식근로자로 또 앞으로 십수 년은 더 버텨내고 생존해야 하기에 학(學)을 뛰어넘는 습(習)이 필수적일 것이다.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배우는 시간의 최소한 세 배, 어떤 이는 아홉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습자지에 옅은 물이 천천히 스며들 듯 물들어가는 것, 지루한 그 과정을 견뎌내는 것이 습(習)이다. 

   이제 굳은살이 살포시 앉기 시작한 아픈 손가락 끝을 만져보며 멀리 다녀온 정신줄 확 잡아채고 기타 줄 천천히 짚어본다. 언제쯤 내 손가락 끝은 단단해져 아프지 않고 고운 소리 낼 수 있을까? 삼 개월이 지나면… 아니,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아린 손가락 끝으로 다시 기타를 튕기며 습(習)의 시간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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