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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Jun 11. 2024

대한외국인

   접수창에 일곱 살 남자아이와 아버지로 메모 된 성인 이름이 떴다. 열나고 기침하는 아이에게 처방을 끝내고 아이 아빠가 진찰 의자에 앉았다. 모자를 벗은 젊은 남자도 아이와 증상이 비슷했다. 하기야 입원했던 어린 환자가 퇴원할 때쯤이면 병간호에 지친 아이 엄마가 시름시름 앓아눕는데, 아이 옆에 붙어 있는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한국 이름을 가진 베트남 엄마, 아빠 손 잡고 나가는 아이를 보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진료실 문을 나서는 세 식구의 뒷모습은 우리나라가 이미 다민족 국가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는 오천 년 단일민족 국가라고 배웠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서기 879년 신라 헌강왕이 학성에 갔다가 개운포로 돌아왔을 때, 홀연히 한 사람이 기이한 몸짓과 괴이한 복색을 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더니, 노래와 춤으로 덕을 찬미하고 임금을 따라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를 처용이라 불렀으며 언제나 달밤이면 시중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나, 끝내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 그를 신인이라 생각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

   ―[고려사] 권 제71, 36장      


   통일신라시대 역신에게 아내를 빼앗긴 처용이 지었다는 ‘처용가’의 기록이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886) 때 등장한 처용의 생김새가 조선 성종 24년(1493년)에 발간된 국악책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그려져 있다. 처용은 주걱턱, 주먹코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국적인 모습이다. 전해지는 기록과 그림 때문에 처용이 무역하러 온 아라비아 상인이라는 의견도 많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쌍기란 인물이 있다. 쌍기는 956년(광종 7) 후주의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머물게 되었다. 병이 나은 뒤 광종(光宗)의 눈에 들어 후주로부터 허락을 받은 뒤 원보(元甫)·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 쌍기는 958년 과거제도 설치를 건의하였으며 958년 5월 처음 실시된 과거시험의 감독관이 되었다. 또한 아랍인과 몽골인도 국정에 참여하였고 귀화인이 많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현재 미국이 그러하듯 고려도 천 년 전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던 멜팅팟(Melting pot)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도 유명하다. 설화일 수도 역사일 수도 있는 얘기지만, 어쩌면 우리나라 우리 민족은 예전부터 주변 여러 나라의 다양한 혈통들이 조금씩 섞이고 어우러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 아닐까? 

   아픈 아이 덕분에 먼 역사책 몇 페이지 들춰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출생률을 보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2023년 우리나라 합계출생률은 0.72로 부부 100쌍(200명)당 72명의 아이를 본다는 뜻이다. 합계출생률이 1 미만으로 지속 되면 인구가 감소하다 언젠가는 이 나라도 없어지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돌아나가는 아이의 가족이 대한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건강히 살아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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