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삼층석탑, 헤테로토피아를 만나다

by 대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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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 뿌연 대기에 매캐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한가한 국도를 달리던 중 희미한 표지판 하나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라, 저게 여기 있었네.' 역사책 한 귀퉁이에 숨어 있던 이름, '감은사지'를 경주 국도에서 만났다. 무엇에 홀린 듯 급히 차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논두렁길을 100m 지나 다시 오른쪽 좁은 길을 3분 정도 달렸다. 주차장 팻말 붙은 공터에 차를 세우고 발을 내렸다. 널따란 돌바닥을 딛고 몇 걸음 옮기다 앞을 본 순간 숨이 막혔다. 야트막한 언덕 위 3층 석탑이 뿜어내는 서기 瑞氣는 마치 다른 세상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작은 터널을 들어서서 신들의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현실 세계를 벗어나 부처의 땅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에 따르면, 죽어서도 동해의 푸른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간절한 유언은 그의 아들 신문왕의 손에서 ‘감은사(感恩寺)’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금당의 섬돌 아래로는 용의 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작은 틈새 하나가 남겨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인간 세상을 벗어나 피안으로 들어선다. 나무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서 천년을 뛰어넘어 감은사 경내에 섰다. 처음 만난 감은사지 삼층 석탑. 넓은 기단 위에 작은 정사각형 돌을 다시 놓고 층층이 쌓아 올린 삼층 석탑. 돌이 아니라 나무를 다룬 듯 세밀하고 기품 넘치는 탑 앞에서 나는 1300년을 살아온 무언가를 보았다. 천천히 탑 둘레를 돌았다. 뒷산에서 부는 바람에 푸른 대나무들이 살랑살랑 나부꼈다. 바람길 따라 감은사지를 걷는다. 건물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았다. 문무왕도 죽어서 동해 수중의 한 줌 돌이 되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이름을 잃고 무생물들만 살아남았다. 문득 그 시절 살아있던 것들은 정말 모두 사라졌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있었지' ' 탄소화합물 중의 탄소의 극히 일부에 포함된 방사성 동위 원소인 탄소-14(14C)의 조성비를 측정하여 그 만들어진 연대를 추정하는 방사능 연대 측정의 한 방법'으로 정의되어 있다. 1300년 전 문무왕이 내쉬었던 공기는 어디에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 AI에게 질문을 던졌다. AI는 순식간에 답을 내놓았다.

"탄소-14의 반감기는 약 5730년입니다. 간단히 계산하면, 당신이 오늘 내쉰 숨 속의 탄소-14는 1300년 뒤에도 85%가 넘게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이론적인 수치이고, 실제 공기 분자들은 지구의 대기를 끊임없이 순환하며 희석되고 재배치됩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감은사를 짓기 시작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이 내쉬었던 날숨의 85%가 이 시대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깜짝 놀랐다. 문무왕의 숨결과 내 숨결도 시간 속에서 겹쳐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 숨결은 생명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그네들이 이 땅에 살아 있었음을 알리는 미세한 흔적이었다. 삶의 정기 精氣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들의 삶이 서린 이 공간은 어쩌면 현실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피안의 세계, 헤테로토피아로 아직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치히로가 터널을 통과해 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 이름을 빼앗긴 채 방황하던 하쿠에게 다시 의미를 찾아준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시공간을 넘어 지속되는 삶과 존재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각자의 헤테로토피아가 필요하지 않을까?


멀리 보이는 뿌연 미세먼지와는 너무나 차이 나는 청량한 대기가 무딘 피부를 깨웠다. 큰 숨 들여 마신다. 천 년을 살아낸 갈라지고 녹슨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다시 찬찬히 올려 보았다. 탑신을 감싸돌고 있는 신라의 대기를 보았다. 깊은숨 다시 내뱉는다. 1300년 뒤 내가 뱉어낸 이 숨결은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어쩌면 감은사 삼층 석탑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먼 훗날 누군가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나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터널을 빠져나와 현실 세계로 돌아온 치히로처럼 나도 감은사지를 벗어났다. 뿌연 미세먼지 덮인 고속도로 위에서 다시 한번 깊은 숨을 내뱉었다. 나의 숨결이 천 년 전 그들의 숨결과 어딘가에서 만나기를 바라며, 백미러 속 희미해지는 석탑 너머로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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