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_위로와 위로가 오가는 곳 , 진료실
눅눅한 날씨에 마음마저 축 늘어지는 오후, 작은 손 하나가 내 책상 위로 샛노란 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지난번 입원했을 때 나를 만져보고 싶어 했던 경수였다.
“이게 뭐야?”
물어도 대답 없는 녀석을 대신해 엄마가 말했다.
“경수야, 지난번에 선생님께 이거 못 드려서 속상해했잖아.”
아이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봉지를 내게 건넸다. 아이의 마음 같은 샛노란 봉지를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고열에 축 처진 아이의 모습에 마음 한쪽이 가라앉았다.
코로나에 기승 떨치는 독감, 쉴 새 없이 아픈 아이들을 진료하다 보니 여섯 시가 되어서야 바빴던 청진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났다. 집 앞 마트에서 맥주 한 병 사 들고 나오는 길, 자동차 미니어처가 눈에 들어왔다. 경수가 젤리를 건네주던 다른 쪽 손에 꼭 쥐고 있던 빨간 자동차가 떠올랐다. 아이가 건넨 선물에 나도 뭐라도 답해주고 싶었다.
아이에게 줄 작은 선물을 고르다 보니, 문득 소아과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 역시 약골이었고, 그중에서도 엉덩이에 난 큰 종기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움푹 팬 흉터를 만질 때면, 그때 아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져 손끝이 저릿해진다. 종기 하나 제대로 치료 못 해 목숨을 잃던 조선의 왕들보다야 내 팔자가 낫다고 웃어넘기지만, 그 기억의 끝에는 늘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울지 않고 진료를 잘 받은 날이면, 의사 선생님이 서랍에서 10원짜리 동전을 꺼내 내 두 손에 꼭 쥐여 주셨다고 이야기하시곤 했다. 그때 내 손에 쥐어졌을 온기 어린 동전처럼, 나도 경수의 두 손에 이 파란 자동차를 꼭 쥐여 주고 싶었다.
며칠 뒤 기다리던 경수가 왔다. 그때보다 훨씬 좋아져 기분 좋게 어깨를 흔들며 들어섰다. 진찰을 마치고 말을 건넸다.
“선생님이 경수한테 선물 하나 주고 싶은데, 받아 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수의 작은 두 손이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파란 자동차를 본 순간 자기 것이 될 거란 걸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파란 자동차를 두 손에 꼭 쥔 채 입꼬리 활짝 열고 인사하며 뛰어나가는 세 살배기 경수의 뒷모습에 웃음이 났다. 훗날, 저 아이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소아과 의사로 남게 될까? 그때쯤이면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 하루가 저 아이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선물 같은 하루’로 기억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