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_위로와 위로가 오가는 곳 , 진료실
털썩. 경재가 까만 진찰 의자에 앉았다. 일주일 동안 점점 심해지는 기침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고열로 고생하던 아이. 체온은 38.9,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청진기를 왼쪽 가슴에 대었다. ‘빠그락 빠그락’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아이들을 괴롭히는 마이코플라스마 폐렴일 것이다. 가슴 엑스레이를 찍자는 내 말에, 엄마 손 잡고 진료실을 나가던 경재는 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엄마, 나도 보류야?”
세상 물정 알 리 없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보류’란 단어. 나는 순간 멈칫했다. 저 아이는 보류의 뜻을 알고 있을까? 어떤 일을 당장 처리하지 아니하고 나중으로 미루어 둔다는 사무적인 단어 보류(保留). 아마 녀석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자기 차례가 몇 번째인지 대기실 모니터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검사나 처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아이의 이름 옆에 뜨는 그 글자를 본 모양이다. 보류란 단어를 내뱉은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름시름 앓는 아이가 내뱉은 그 차갑고 낯선 단어에, 엄마는 또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을까.
어릴 적에 나도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보기 흉하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수두를 앓았던 흔적이 얼굴에 자잘하게 남아있다. 또 엉덩이에 고름이 많이 차서 병원에서 힘들게 짜내기도 했다. 아팠던 흔적은 남아있지만 아팠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팔순이 다 돼가는 어머니는 아직도 그때 얘기를 하신다.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어린 아들에게 젖 한번 제대로 물리지 못했다고. 그래서 어릴 때 아범이 자주 아팠다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 갓 스물 지난 젊은 엄마는 스무 명도 넘는 대식구의 막내며느리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쨍한 아들 울음소리에도 마음대로 달려가지 못했던 그 마음은 어땠을까? 엉덩이를 더듬어 만져지는 움푹 팬 상처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파도가 되어 어머니란 단어를 싣고 마음에 부딪는다.
십 분쯤 지났을까. 기침을 연신 해대면서도 방긋 웃는 녀석이 다시 진료실로 들어왔다. 기침 소리 뒤로 보이는 아이 엄마의 흔들리는 눈동자. 엑스레이 사진을 열었다. 예상대로 왼쪽 폐 절반이 하얗게 보였다.
“폐렴이 심해요. 입원해서 치료 시작합시다. 만약 열이 하루이틀 내로 떨어지지 않으면 특수한 항생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 엄마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재는 스티커를 달라며 엄마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간호사가 잠시 망연자실한 듯 서 있는 엄마를 데리고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경재는 치료를 위해 일주일은 병원에 있어야 한다. 아픈 아들 곁에서 병간호해야 하는 경재 엄마는 한동안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이는 아팠던 기억을 잊겠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엄마에겐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 앞에 놓인 보류된 며칠이 엄마와 아들을 더 단단하게 이어주는, 서로를 지키는 든든한 보루(堡壘 지켜야 할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