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_위로와 위로가 오가는 곳 , 진료실
진료실 책상 위 전화벨이 울렸다. 병동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입원한 아홉 살 K가 열이 떨어지지 않고 발진이 심해져 보호자가 애를 태운다는 것이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할머니가 기운 없이 늘어진 손주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이의 몸통엔 어제 보이지 않던 다양한 발진이 퍼져있었다. 힘없이 벌린 입안 뒤쪽 연구개 부위에도 자잘한 발진들이 보였고, 혀도 빨긋하게 오돌토돌 올라온 점막들이 딸기처럼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병명을 떠올렸다.
“GAS 신속항원검사 나가고 throat culture 나가봅시다.”
'성홍열(猩紅熱)'. 이다. 성홍(猩紅)은 ‘오랑우탄의 털빛처럼 검붉게 짙은 빛깔’을 뜻한다. 영어로는 진홍색을 뜻하는 scarlet과 열을 나타내는 fever를 합쳐 Scarlet fever라고 부른다. 병명에 떡하니 올라갈 정도로 특징적인 발진 상태를 보이는 성홍열은 A형 연쇄상구균(Group A Streptococcus, GAS)이 원인균이다. 주로 6~12세 아이들이 잘 걸리며 K와 같은 증상들이 특징적이다. 페니실린계 항생제를 10일 정도 사용하면 대부분 완치된다. 하지만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거나 불충분하게 사용한다면 폐렴이 동반되거나 심근염(myocarditis) 등을 일으키는 류마티스 열(rheumatic fever)로 진행되어 좋지 않은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원장님 GAS positive입니다.” 보고를 받고서 안심이 되었다. 이미 경험적으로 페니실린계 항생제를 쓰고 있으니, 별다른 일 없으면 아이는 합병증이나 후유증 없이 무사히 회복할 것이다.
“어르신, K가 성홍열입니다. 원인균에 맞는 항생제 치료 잘 받고 있으니 금방 좋아질 겁니다.”
고맙다고 고개 숙이는 어르신에게 인사하며 돌아서 나오려다, 조심스레 한 말씀 더 드렸다.
“어르신, 성홍열 옮으면 큰일 납니다. 마스크 잘 쓰시고, 다른 보호자와 교대 하셔야 합니다.”
얼마 전 일본에 ‘독성쇼크증후군’(STSS, Streptococcal toxic shock syndrome) 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2023년 7월부터 12월까지 50세 미만 환자는 총 65명이 감염됐고, 이 중 21명이 패혈성 쇼크와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해 치사율 30%가 넘는다는 기사였다. 이 질환의 원인균이 성홍열을 일으키는 A형 연쇄상구균이다.
인후통과 발열, 발진 등으로 아이들을 고생시키지만, 좋은 항생제 덕분에 대부분은 별 탈 없이 감기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30세 이상 특히 면역체계가 좋지 않은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열감기로 시작해서 폐렴으로 진행되거나 조직 괴사나 장기부전 등으로 이어지는 독성쇼크증후군으로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이 익숙하고도 낯선 병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다. 어릴 적 읽었던 소설 <작은 아씨들>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남북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로 마치가 네 자매의 가족사가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졌다.
네 자매 중 피아노를 잘 쳤던 셋째 베스가 열병을 앓다가 죽는데 그 아이를 죽게 한 병이 성홍열이다. 항생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합병증 중 하나인 폐렴이나 심근염으로 죽었을 것이다. 영국 생물학자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기 60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홍열이나 세균감염으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을까. 하지만 의학이 발전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매년 50만 명 이상이 이 균으로 목숨을 잃는다.
나는 다시 한번 할머니의 지친 얼굴을 보았다. 아픈 손주 곁을 지키느라 당신의 몸은 돌보지 못했을 터. 행여나 손주의 균이 할머니에게 옮겨 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K의 할머니가 손주가 앓는 성홍열도, 일본을 공포에 떨게 한 독성쇼크증후군도 모두 무사히 비켜 가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