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_살리고 싶지 않은 의사는 없다
“아이가 아침 내내 ‘이거 하면 용과 선생님이 좋아하실까?’ 하면서 제일 좋아하는 머리핀을 꽂았어요.”
엄마의 말처럼 초록과 핑크로 차려입고 진료실에 들어선 다섯 살 J. 집에서는 그리 야단법석을 떨며 준비했다고 하더니 막상 내 앞에 앉아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 수줍음이 귀엽기도 하고 이쁘기도 하여 절로 웃음이 났다.
J를 보아온 게 한 3년 되었나? 유모차를 타고 처음 온 뒤로 별일 없으면 늘 내 진료 시간에 맞춰 오던 아이. 어느새 훌쩍 커버려 두발로 깡충깡충 귀여운 토끼처럼 웃으면서 들어와서 엄마 아빠 따라 이사 간다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그동안 잘 봐줘서 고맙다고, 엄마 손에 등 떠밀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인사하고는 돌아서서 나가는 아이 손등에 커다란 하트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무언가 모를 서운한 마음이 슬며시 차올랐다. 문을 닫고 나서는 어린 J의 뒷모습에, 이별 이야기 두 개가 떠올랐다.
한나라 원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흉노를 달래기 위해 궁녀 하나를 흉노 왕에게 보냈다. 궁녀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흉노 왕이 죽자, 그의 큰아들과 결혼해 딸 둘을 낳고 살다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에 묻혔다고 한다. 중국 4대 미녀 중 하나인 왕소군 이야기다. 당나라의 시인 동방규가 왕소군의 심정을 노래하였는데 이 중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라는 대목이 유명한 구절이다. 그녀는 스물 근처에 고향을 떠난 후 고향의 땅을 밟지 못한 채 타지에 묻혔다.
1801년 순조 2년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으로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영화 ‘자산어보’로 정약용에 묻혀 있던 그의 이름이 어느 정도 세상에 알려졌다.-은 유배를 갔다가 그해 10월 천주교 탄압에 저항하는 문서를 북경의 주교에게 전하려다 발각된 ‘황사영 백서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유배지를 향해 이동하는 도중 나주 율정의 주막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헤어진다. 1816년 정약전이 죽을 때까지 형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정약용은 그 슬픔을 ‘율정별栗亭別’ 이란 시에 담았다. 왕소군이 경계에서 느꼈을 슬픈 마음과 고달팠던 형제가 컴컴한 주막에서 보냈을 밤이 떠올랐다. 역사 속의 거대한 이별들이 그 작은 아이의 뒷모습 위로 겹쳐 보였다.
그리고 내게는 가장 아픈 이별의 기억이 있다. 아마도 J만 한 나이였을 것이다. 오빠를 기다리다 부리나케 소매를 끌어당겨서는 언니가 자기에게 했던 고약한 행동을 일러바치고는 오빠 손 꼭 잡고 옥상에 올라가서 시원한 바람 쐬며 좋아하던 아이였다. 어렸던 오빠가 더 어렸던 여동생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날 이후 동생을 만날 수 없었다. 한 번씩 보이는 엄마의 눈물이 그 일과 연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집에서 아무도 동생 일을 얘기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살지 알 수 없는 나이 드신 어머니께 자식 잃은 상처를 어찌 말로 물어 볼 수 있을까? 몇십 년도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 일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큰 병원에 일하며 어린 천사들을 떠나보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되었으리라. 먼저 떠난 나의 어린 동생도 그곳에서 밝은 빛으로 그들을 맞아 주었을 것이다.
많이 아프지 않아도 한 번씩 와서 고마운 인사 해주던 예쁜 J는 서둘러 이별의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용과 선생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건강하세요.” 엄마하고 연습했을 짧은 대사에 가슴이 울렁였다. “J야, 잘 가 그동안 내게 와줘서 고마웠어. 앞으로도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렴.”
다시 볼 수 없을 작은 이별이지만 웃음으로 J를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