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_서늘한 사직서

3부_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내일이 되길

by 대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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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로 사직을 원합니다.’

‘살려고 돈 벌려고 일하는데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바로 퇴사 원합니다. 잡는다고 또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사직서의 날 선 문장들에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이미 다른 간호사 한 명이 이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기로 한 터였다. 책임져야 할 아픈 아이들이 한 병동에 20명. 온종일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무릎이 성치 않은 데다 평발이라 너무 힘들다고 얘기하는 그 직원을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정말 아팠을 것이다. 나도 병원 계단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무릎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일쑨데 12시간 근무하면서 셀 수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 무릎에선 어떤 소리가 났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J 간호사였다.

“뭐 때문에 그만두려고 하는 거예요? J 간호사 없으면 일 안 돌아가는 거 알잖아요!”

정말 그랬다. 성실하고 꼼꼼한 J를 아이 엄마들은 무척 좋아했다. 열나는 아이, 토하는 아이 때문에 몇 번씩 호출 벨을 눌러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 J가 지금 내 앞에서 퇴사를 말하고 있었다. 5개월 전, 우리 병원은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었다. 코로나 확진된 아이들을 위해 아동병원협회와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가 협의하여 그 아이들을 입원시킬 수 있게 되었다. 마스크, 페이스쉴드, 방호복에 장갑까지 끼고 정맥주사를 놓아야 하고 혈액 채취에다 바이털 사인까지 점검해야 하는 고된 일도 묵묵히 해낸 그녀였다. 고열 나서 늘어져 있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 엄마들도 정말 고마워했다.

잠잠해지던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몇 달 전 코로나를 앓았던 아이들이 다시 감염되어 오기 시작했다. 39도 넘는 고열에 입원해서 나트륨 칼륨 등이 포함된 전해질 수액 맞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 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일이었다. 느슨해진 경계심 때문이지 아이 보호자들이 병원 규칙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배달 음식을 아무 때나 주문하기도 하고, 보호자 한 명만 병실에 있을 수 있지만 수시로 몇 명씩 와서 병원을 요란하게 했다. 심지어 아이 잘 때 병실에서 술판을 벌이는 일까지 생겼다. 규칙을 지켜달라는 간호사들의 요청에, 일부 젊은 부모들은 거친 말에다 때로는 등 뒤에 대고 비속어를 내뱉었다.

“원장님, 너무 지쳤어요. 더는 힘들어서 일 못 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J 간호사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녀마저 떠나면 2교대 근무 스케줄은 무너지고, 남은 간호사들의 업무는 가중되어, 또 다른 이탈자를 낳을 것이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지방이라 간호사를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월급을 획기적으로 올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80%에도 미치지 못하는 원가 보존율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이야기한들 당장 도움 되지는 않을 테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에서 ‘감정노동의 시대, 의사도 감정노동을 하는가?’란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소아청소년과의 감정노동 수준은 72.26점으로 정신건강의학과(75.77점)와 재활의학과(73.31점)에 이어 세 번째였다. 감정노동, 그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아이를 의자에 앉혀놓고 무슨 얘기를 하나 보려는 듯 팔짱을 낀 채 꼬나보는 보호자에다 진찰 중에도 전화 통화를 시끄럽게 하는 아이 아빠까지 진료실 풍경은 다양했다. 진료 공간에서도 그 정도인데 하물며 주치의가 없는 병동에서, 그들이 자기 아이를 보살피는 간호사에게 어떤 행태를 보였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감정의 칼날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불편하였던 감정의 찌꺼기를 어찌 해결하였으나 돌아보았다. 대학병원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날것의 감정들을, 나는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다. 퇴근할 때 청진기를 책상에 두고 오듯, 그날의 불편한 감정 앙금을 병원에 떨쳐내기 위해 수없이 손을 씻었다. 나만의 감정 배출구를 찾는 데 꼬박 몇 해가 걸렸다. 그렇게 겨우 나만의 생존법을 터득한 내가, 이제 막 감정의 칼날 위에서, 소진되어 버린 그녀에게 ‘몇 년만 버텨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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