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지하철 (2)
{지난 편까지의 이야기}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만 같을 때, 나는 나만 탈 수 있는 상상의 지하철을 타곤 해요.
기다란 좌석에 앉아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회복의 여정을 시작해요.
이윽고 눈을 뜨면, 열차는 어느새 동틀 무렵의 지평선과 나란히 놓인 바닷가 철로를 따라 달리고 있어요.
나는 긴 좌석에서 일어나서 다음 칸으로 가면서, 어느 규칙적인 소리에 유년 시절의 무해하고 선선한 아침을 떠올리죠. 바로, 엄마의 경쾌한 도마질 소리.
엄마가 가졌으면 좋았을, 서서 살림하기 좋고도 편한 예쁘고 환한 부엌에 들어서면, 나무 찬장에는 아기자기한 것들이 가득하고, 세월의 흔적이 윤기처럼 빛나는 서랍에는 손님용 커트러리도 들어 있어요.
나보다 젊은 엄마는 거기서 푸른빛 꽃무늬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가지를 굽고 감자를 썰고 생선구이와 소고기 불고기까지.
나는 이제 노년의 엄마에게 괜찮다고, 하시지 말라고, 내가 하겠다고, 그만 쉬시라고 말하곤 하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식탁에 앉아 창밖 경치를 보며 발을 괜히 노닥거리기도 하며 가만히 엄마 뒷모습을 보아도 좋을까요.
그러면 엄마는 찬장에서 오늘 마음에 내키는 예쁜 그릇을 찾아 음식을 내와요.
그 그릇은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내 사랑스러운 외할머니가 물려주신 것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우리는 노란색 체크 무늬 커튼이 달린 창가 옆 식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울 거예요.
오늘은 오늘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해요.
엄마, 오늘만큼은 이 딸 걱정을 하지 마세요.
난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았었을 날들을 이야기할래요.
엄마에게 있었으면 좋았었을 것들을 보고 만질래요.
그날들에 우리가 지금 있어요.
엄마, 미안해요.
엄마의 젊음을 내가 다 가져가 버리고도
결국 나도 그 젊음을 내 아이들에게 다 주었어요.
엄마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예쁜 것 하나 제대로 가져보지도 못하고 지켜낸 나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엄마 쪽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은 엄마를 뒤에서 안을 거예요.
이제는 앙상하게 드러난 엄마의 쇄골을 떠올리면서, 젊은 엄마의 포근하고 그리운 살 냄새를 맡을 거예요.
아마 더 말하지 못하고 눈물만 떨어뜨리겠지만, 엄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에요.
무수한 날, 엄마가 안타까워하며 내게 품었던 마음처럼.
지하철은 우리가 지나쳐온 시간처럼 달려요.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것 같지만 의식하는 순간
때로는 한없이 느려지고 때로는 너무 빠르죠.
나는 엄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일어서요.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웃으며 인사할래요.
엄마를 떠나던 때면 무수한 핑계를 대곤 했지만
정작 가게 된 곳이 엄마 품보다 더 나았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 지나고 나서 돌아보는 그 잿빛과 물빛 길들 위에서 우린 너무 느린 반 걸음씩이라도 어른이 되지 않았었을까.
나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요.
나 혼자 떠나도 좋을 곳으로요.
화창한 날씨가 아니어도 좋아요.
바람이 불고 길가의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이 흔들려도.
살며시 먹구름이 하늘의 빈자리로 끼어들어 비를 흩뿌려도.
그럴수록 더욱 아늑한 나만의 방으로 떠날래요.
어느새 나는 아이처럼 바퀴 달린 운동화를 신었을지 몰라요.
아니면 발레리나의 토슈즈는 어떤가요.
분홍색 리본이 가느다란 발목을 예쁘게 묶어줘도 좋아요.
마치 발레리나처럼 나는 듯 미끄러져서 다음 칸으로 가요.
창밖으로는 우산 쓴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역에는 자기만의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