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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예 May 09. 2024

수지 할머니의 롱블랙, 그 남편의 더블 에스프레소

그 카페의 단골 손님들

이것 저것 정리하다 뒤를 돌아 새로 놓인 주문서를 본다. 오늘도 도착한 롱블랙과 핫 밀크 온 더 사이드, 그리고 더블 에스프레소와 핫 워터 온 더 사이드. 우측 창문으로 바깥 자리를 바라보면 여김없이 수지 할머니가 그의 남편과 앉아 계신다. 


언제부터 이 부부의 일과였는지는 모른다. 대화 없이 앉아서 각자 다른 시선으로 어딘가 바라 보며 커피를 마시는 모습. 서로를 다정히 바라보는 커플은 아니나 흰 머리 지긋한 모습으로 마주보고 앉아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사랑 같다. 


1x Long Black 
- 1x Hot milk side

1x Double Espresso
- 1x Hot water side

롱블랙에는 핫 밀크를 따로 주고 더블 에스프레소에는 핫 워터를 따로 달라는 의미다. 처음엔 추가 요구사항이 붙은 메뉴를 보면 멈칫했다. 한국에선 모니터 화면만 보고 일했기에 몸으로 하는 일을 하고싶어 택한 바리스타. 가끔 화면을 보고 일할 때 보다 복잡한 메뉴를 보면, 심지어 여러 주문들이 몰려들어온 때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수지 할머니의 주문도 그랬다. 처음엔 '바쁜데 말이야. 롱블랙만 시키지!'로 시작해 여유가 생기고 문밖으로 그 손님이 누군지 보고 나니 이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반갑기만 했다. 


파트리샤 할머니의 라떼 
왼쪽은 라떼, 오른쪽은 모카 in Dukes

파트리샤 할머니도 그랬다. 큰 개와 함께 테라스 자리에 앉던 그 할머니는 기억할 수 밖에 없었다. 주문서에 Patricia라는 이름과 따뜻한 라떼를 늘 시켰다. 호주 카페에서 라떼는 둥근 잔이 아닌 길쭉한 컵에 담기는데 할머니에겐 둥근 잔에 꼭 담으라는 올라운더 친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스 롱블랙의 그 청년

기억에 남는 손님들은 한둘이 아니다. 호주에서도 늘 아이스를 찾던 나인데, 한번은 한 카페에서 아이스 롱블랙을 시켰다. 얼음이 거의 녹아 한 두개만 둥둥 떠다니는 미지근한 커피를 받고 실망했다. 한국에서 아이스를 시킬 땐 이런 걸 기대하지 않는데 말이야!


우리 카페엔 아이스 롱블랙 라지를 늘 테이크아웃 해가던 중국계 청년이 있었다. 처음 아이스 롱블랙 주문을 받고 '한국의 아아 맛을 보여주겠어!'라고 하며 얼음 가득 넣고 물 약간에 에스프레소를 촥 올려줬다. '다음에 또 오게 될 걸?'이라고 속으로 말했는데 놀랍게도 그 이후 내가 일하는 날마다 와서 매주 아롱을 사갔다. 



잠은 주무십니까? 하루에 두 번 플랫화이트를 시키던 래퍼

커피를 이렇게 많이 사마신단 말이야? 싶었던 한 남자. 일을 시작한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매일 오던 그 손님은 늘 플랫화이트를 테이크아웃 해갔다. 그것도 하루에 두번이나. 물 대신 커피를 마시는 건지, 밤에 잠은 잘 올라나 싶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세 번도 방문해서 이 정도면 커피 중독 아닌가 했다. 


20대 초반엔 아메리카노 한잔도 다 못 마셨다. 먹고 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잠도 잘 못 잤던 나라 하루에 두잔 아니 세잔 이상을 마시는 사람의 카페인 소화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캐주얼한 옷차림과 특유의 태가 있던 손님은 어느 날 호주인 올라운더 친구와 대화를 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그는 음악을 하는 래퍼였다는 사실..!



I love your Mocha.

시간이 가면 갈수록 너무 바빠 만신창이 모습으로 일하던 카페에서 설렜던 순간이 딱 한 번 있다. 처음 본 것 같은 손님이었는데 모카 주문이 들어와서 만들어 내놓았다. 커피 머신 옆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잘생긴 손님이 다음 커피를 만드는 내 앞에 서길래 고개를 들어보니 "I love your Mocha."하며 씩 웃으며 갔다. 


'어머! 내 모카를 사랑한대.'(직역) 


어쩌다 잘 나온 모카를 저번에 드셨나보구나. 웃으며 간 그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너무 바쁜데도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속으론 '난 아이러브유~'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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