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서평
왜 혐오인가. (혐오사회(카롤린 엠케) 서평)
미래를 저당잡힌 불안한 청춘들에게 분노나 저항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 왜 절망에 빠진 젊은 세대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시대에 분노하고 이 시대를 만든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어야할 것 같은 젊은 세대들로부터 들리는 소리는 ‘혐오’라는 낯선 단어이다. 왜 그들은 혐오하는가. 그들은 누구를 혐오하는가.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이 벌어지자 여성혐오가 이슈가 되었다. 혐오가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드러난 것에 온 사회가 놀랐다. 왜 혐오하게 되었을까. ‘된장녀’, ‘김치녀’,‘김여사’ 등등의 언사들이 실은 여성혐오의 징후였을 것이다. 특정한 일부의 행태를 전체 여성으로 일반화하여 조롱거리로 삼는 장치들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군가산점문제 등등도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혐오현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혐오를 받는 대상에서 혐오의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은 중요한 단서를 놓치는 것이다. 혐오당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혐오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된 것일 뿐이다. 왜 혐오의 대상이 필요할까. 불안한 자기 존재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바로 대면하지 못하는 무력감과 불안감이 그 원인이다. 마치 ‘꽃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하나의 혐오의 대상을 찾아낸 것일 뿐이다. 혐오할 만한 근거는 언제든지 만들어지고 확대된다. 모든 차이는 언제든 혐오의 이유가 될수 있다. 단지 나와 혹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이데올로기적 가림막이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는지를(P 54).’ 깨닫는 것이다.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하는 사람들에 주목해야한다. '걱정이라는 외피에 감싸인 증오가 혹시 공권이 박탈되고 주변화된, 정치적 대표성이 결여된 이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이나 배출구는 아니지도...(P. 54)’
왜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타자에대한 혐오일까.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사회 성원은 개인이 아닌 계급으로 존재했다. 불평등, 빈부격차, 실업문제는 개인의 문제 이전에 계급의 문제였고 세대 전체의 문제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개인의 실패와 성공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달려있다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기 시작했다(한병철, 피로사회). 개인은 스스로를 착취하면서 성공한다. 성공하지 못한 개인은 스스로 우울과 무력감에 빠진다. 무력감에 빠진 불안한 이들은 제 3자를 혐오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를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무력한 패배자로 더욱 옭아맬 뿐이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위함할 뿐만 아니라 절망적이다. 혐오는 소통의 단절, 상상력의 빈곤에서 비롯된다. 또한 지배계급은 다양한 방법으로 혐오를 조장하고 강화한다. 혐오와 증오는 침묵의 사회를 만들어낸다. 비이성의 맹목적 경향이 사회를 지배하면 할수록 지배자들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지고, 자본주의 맨 하단에서 빼앗기는 자들의 처지는 더욱 절망적이 될 수밖에 없다. 혐오를 주고받는 가짜 갈등이 전면에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전면적인 사회 변혁의 가능성과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혐오사회가 위험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혐오는 우리가 벗겨 내야할 또 다른 종류의 눈가리개다.
어떻게 혐오의 눈가리개를 벗겨낼 수 있을까.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은 잠시 주목받는 도구이상의 의미는 없다. 결국 소통하고 함께 상상하고 실천하는 광장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우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혐오는 사라질 수 밖에 없다. 혐오의 눈가리개를 벗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혐오를 극복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