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5: 시선 c.

시선 c.

by 다온

20XX.06.12.


다른 사람들도 그런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고민을 해결하려고 시작한 일 때문에 고민을 더 얻게 되는 그런 경우. 오늘 한 지인에게 추천 받은새 상담 선생님과 첫 상담을 진행했다. 평소와 같았으면 상담을 하고 난 후에 마음이 좀 정리가 되었을 텐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상담 동안에 할 말이 없었다. 내게 상담이 중요한 이유는 상담 시간이 어떤 평가를 당할 두려움을 갖지 않고, 꾸밈 없는, 거짓 없는 나의 이야기를 솔직히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한 상담은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처럼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철저히 내가 평가 당하고 있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일단 상담 첫 질문부터 이상했다. 기존의 상담에서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혹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어요?’ 와 같은 일상적이고 꾸밈 없는 나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질문으로 시작을 했는데, 오늘 가진 상담의 첫 질문은 바로, ‘어머! Adios Malice에서 활동하는 자유님 아니세요? 어머 세상에!!’ 였다. 황당했다. 내가 ‘자유’가 맞긴 하지만 나는 상담 시간에는 ‘자유’라는 존재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네 맞아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저는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라서요.’


상담선생님 아니 중요하죠~저 자유님 따라서 산 물건이 한 두개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거 정말 다 직접 사용해 보시는건가요?


나: 하…네. 선생님 같은 분들을 위해서 직접 사용하는 모습도 다 찍어서 올리잖아요.


상담선생님: 아유 말씀도 참, 좀 궁금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오늘 하시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나요? 뭐 워낙 걱정 없이 인생을 사실 것 같아서 이런 상담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지만요.


나: 절 아주 잘 아시나 보네요? 저는 분명 오늘 선생님을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저는 상담 때 늘 제 일상과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오늘도 그러고 싶고요.


상담선생님: 우와 일상 이야기라니, 그러면 저는 영상에 비춰지는 모습 말고도 비공개 내용들도 다 볼 수 있는 거네요! 너무 궁금해. 얼른 말씀해주세요.


나: 하, 비공개라니요. 저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는데 여기 ‘자유’로서 온 것이 아닙니다.


상담선생님: 그래서 평소에도 그렇게 깔끔하게 해놓고 사시는건가요? 그렇게 관리하고 살려면 쉽지 않을텐데…예전처럼 가사 서비스 이용이 편한 것도 아니고…허가를 받아야 하잖아요. 아! 자유님은 연줄이 있으신가?


나: 그 질문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가 않네요. 그냥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상담선생님: 아…네. 너무 까다롭게 구신다. 그 정도는 궁금할 수도 있지요. 그래요,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데요?


나: 일상이…


상담선생님: 아 저 정말 딱 한 가지만 여쭤보면 안 돼요? 자유님 정도면 일찍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셨을 것 같은데 왜 아직 여기 남아 계신 건가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나: 지금 대체 뭐하시는 거예요? 오늘 세션은 여기서 끝이고 오늘 세션에 대한 비용은 보내드릴 테니 다음 상담은 진행하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러고는 화가 난 상태 그대로 화상 통화에서 나와버렸다.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강제로 공개 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유’는 철저히 일할 때에만 사용하는 이름이고 나와 가까운 사람 중 그 누구 하나도 나와 ‘자유’라는 정체성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유’로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과 본연의 내 모습이 다르기도 하고. 나는 분명히 ‘나’의 고민을 말하고 ‘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상담을 하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닌 ‘자유’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아야 했다. 이 사람을 좋은 상담가라고 추천해준 인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왜 한 사람 안에 한 가지의 정체성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설령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들마저 자신이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만 보는 것일까? 내게 본래 ‘나’의 모습과 ‘자유’로서의 모습 모두 갖고 있지만 나는 ‘나’ 라는 정체성을 갖고 오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상대는 내가 그저 ‘자유’로만 보였던 것이고 남에 대한 쓸데 없는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존재로만 여겼던 것이다. ‘나’라는 모습이 철저히 짓밟힌 기분이다. 상담을 하기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가장 도움이 되는 탈출구들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 상담도 이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다니…이제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어떤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걸까. 약만 내성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보다. 모든 치유의 방식에는 저마다의 부작용, 내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전 19화일기 5: 시선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