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 오전 7시 30분, 나는 귀국길에 올랐다. 보츠와나 수도 가보로네에서 남아공 수도 요하네스버그까지 40분의 첫 번째 비행, 공항 대기 4시간, 요하네스버그에서 카타르 도하까지 9시간의 두 번째 비행, 공항 대기 2시간, 그리고 도하에서 인천까지 10시간 반의 세 번째 비행으로 나는 만 하루 이상을 하늘과 공항에서 보내며 마침내 12월 31일 오후 4시 40분, 한국에 도착했다. 오랜 비행으로 몸은 지치고 지쳤지만, 도착하고 나니 아프리카 남단에서 아시아 극동까지 시공간을 순간 이동한 느낌이었다. 이로써 고용휴직 계약서상의 360일이 끝이 났다. 1년에서 단 5일 빠진 그 기간 동안 온전히 아프리카 대륙에서만 머물다 이제 돌아온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게 좋으면서도 바쁜 현실로의 복귀는 더 미루고 싶은 것이었기에 귀국 심정은 왠지 착잡했다. 그런 묘한 감정으로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건물로 들어가는데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수하물팀 직원을 발견했다. '설마 나겠어?' 하면서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그들이 찾는 사람은 내가 맞았다. 그녀는 내 이민가방이 남아공에서 비행기에 아예 실리지 않아 아마 내일쯤 올 것이고 집에 택배로 보내준다고 했다. 그 무거운 짐을 집으로 바로 보내준다니, 거기다 하루 지연된 것에 대한 USD 50의 보상금도 준다니 나는 수하물 사고가 난 게 오히려 좋았다. 당장 필요한 서류와 겨울옷을 기내용 수하물로 챙겨 왔고, 가방이 무사히 한국까지 배송되지 못할 이유도 없어 마음이 편안했다.
잠깐 해외에 나갔다 귀국할 때마다 인천공항에서 보게 되는 ‘도착’ 표지판이 나는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그 두 글자는 휴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한 나라가 한국인에게 비자를 요구하는지, 인종 차별의 우려는 없는지, 입국 심사 직원이 까다롭진 않을지 등에 대한 대비가 전혀 필요치 않고 간단한 자동출입국심사를 거쳐 당당히 입국하는 '내 나라'라는 점은 정말 좋지만, 입국 허가를 받음과 동시에 진짜 한국 땅이 시작되고 나는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니 불편한 마음도 동반되었던 것이다. 나는 아프리카로 출국을 할 때, 일 년이라는 장기 출타 후에 귀국을 하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했다. 과연 그땐 한글, 한국말, 한국 사람으로 가득 찬 인천공항이 반갑기만 할까, 아니면 여전히 좀 더 외국에 머물고 싶다며 아쉬워할까. 나는 360일 만에 한국에 돌아오며 드디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아직도 후자로 살짝 더 기울었다. 가족 상봉만으로도 한국은 내게 이미 최고의 목적지이지만, 즉시 직장과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해야 한다는 부담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금방 녹아드는 게 내 특기이니, 나는 입국장에 들어서서 일시정지 상태인 휴대폰 서비스를 원상 복구하는 것부터 한국 적응 수순에 돌입했다. 2019년의 마지막 날은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했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칼바람이 격하게 나를 환영했다. 그 밤, 서울 땅을 직접 걸어보니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러웠다. 마치 어제의 나도, 그제의 나도 이 길을 지나 집으로 갔던 것처럼. 내 마음이 이렇게 한순간 안정을 찾은 듯, 하루 사이 30도 넘는 기온 차를 겪고 있는 내 몸도 어서 고국의 날씨에 적응해주길 바랐다.
1월 1일 공휴일이 지나자마자 1월 2일에 학교로 출근을 했다.출근길 러시아워를 약간 넘은 시각이라 지하철에 사람이 많지 않아 좋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가는데 냉동실 안을 걷는 느낌이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오랜만의 출근이라 긴장이 되어 어깨가 잔뜩 움츠려졌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복직 서류를 제출하고 2020학년도 업무 분장을 신청했으며, 남은 2019학년도 기간에는 휴직 들어가신 분을 대신하여 6학년 담임교사 업무를 맡게 되었다.
당장은 겨울방학 기간이라 적응할 시간이 주어져 다행이었다. 짐도 하나씩 정리하고, 다시 일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도 서서히 하게 됐다. 건강적으로 염려됐던 부분은 병원 검진 결과 아무 이상이 없어 안심이 되었고, 보츠와나에서 고장 난 아이폰과 노트북은 서비스센터에 가져가자마자 폐기가 결정되었다. 현지에서 이리저리 수리를 맡기지 않았더라면 한국에서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사람들 말대로, 보츠와나에서 고치려고 한 내가 용감한 거였다. 서류 처리도 하고 친척들도 만나고, 초반에는 이렇게 볼 일들 때문에 바빴지만, 이후에는 하루 종일 뜨끈한 방에서 쉼을 가지며 집에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집에 조용히 있다 보면 '내가 꿈을 꾼 건 아니었을까' 하고 아프리카에서의 삶이 아득해졌다. 머나먼 곳에서의 내 생활은 분명 녹록지 않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이 되어버린 그때의 기억은 벌써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있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법이지만 나는 내가 지나왔던 그 길이 가장 나다운 방식이었다고 생각하고, 인생의 귀한 일 년을 쏟아부은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려 한다. 어느 누구의 찬사나 공감도 필요 없다. 어차피 다 설명할 수도 없고, 내가 오롯이 겪어낸 그 모든 것들은 나만 알기 때문이다.
나는 7월 케이프타운 여행에서 내게 큰 인상을 주셨던 분을 기억한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출신의 50대 후반 백인 여성분으로 성함은 프리다(Freda), 직업은 호텔의 버틀러(Butler)라고 하셨다. 나는 이 분만큼 자기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없다. 호텔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고 휴일에도 출근하고 싶고 당연히 업무 스트레스도 없다고 하셨다. 직장인이 이런 마음일 수 있다는 게 실화인가?
"나도 이런 일을 찾은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 나는 50살이 넘어서 이 일에 관심이 생겼고 그때 버틀러 스쿨에 갔어. 같이 교육받던 친구들은 다 우리 아들만 한 나이였어.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뭐야? 뭘 하면 행복해? 하고 싶은 일을 해. 젊잖아. 열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을 해. 늦지 않았어. 네 인생을 위해 어서 찾아 시작해"
'Passion'이 반복되던 그녀의 조언은 내 머릿속에 그대로 와서 박혔다. 그리고 10월, 그분의 SNS에 하노이행 보딩 패스 사진과 'There's always a moment that separates the past from the future, and that moment is now'라는 한 마디가 올라왔다. 해시태그는 'newbeginnings'와 'privileged'였다. 베트남에 버틀러 스쿨을 열어 사람들을 교육하며 사는 게 꿈이라던 그녀의 목표가 실현되고 있었다. 나는 그 포부와 결단에 박수를 보냈고, 새로운 곳에서 그녀가 내내 안녕하길 빌었다.
내 선택과는 상관없이 나는 떠나기 전과 정확히 같은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전에는 포지션 자체가 행복의 결정적 요소인 줄 알았지만, 이젠 그 포지션에서 부딪칠 일과 사람들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할 말은 하고, 부당한 일은 거절하고 불편한 관계는 끊어내며 매 순간 자신의 행복을 단호히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은 '특권'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특권을 누리는 것이 삶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싶다. 나는 어제의 도전을 막 끝내고 오늘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욕심이 많아선지, 이루지 못한 어떤 것이 크게 남아선지 나는 이제껏 많은 아쉬움을 안고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면 버틀러 프리다가 그리도 강조하던 열정은 어떤 형태로든 내 삶에 늘 존재했고, 하고 싶은 일을 좇아가지 못하던 순간에도 내 앞에 놓인 일에 소홀하진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긴 여행에서 막 돌아온 스스로에게 진심 어린 격려를 보내주고, 잠시 여유를 갖자. 인생은 수고롭고도 찬란하니,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기대하며 매일을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