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라이가 되고 싶어

소심자의 별 희한한 인생 목표

by 다온

"너는 보기보다 마음이 너무 여려"


나는 '여리다'보다 '보기보다'에 더 신경이 쓰인다. 외유내강이 아니고 외강내유라니 이것만큼 손해 가는 일도 없다. 그런데 내 친구가 하나 깨우쳐준 게 있다. 이게 직장에서만큼은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본인은 순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쉽게 보는 면이 있다며, 너는 그렇지 않아서 좋겠단다. 그러고 보니 안하무인이라던 어떤 사람도 내게 다짜고짜 무례를 범친 않았던 것 같다.


한편, 나는 고 싶은 말을 참을 순 있어도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진 못한다. 그래서 아첨이나 아부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애초 기했다. 그렇게도 '살 빠지셨다, 예쁘시다'는 말을 바라던 상사에게 나도 남들처럼 립서비스를 했다면 더 챙김 받을 수 있었을까? 적어도 직장에서만큼은 윗사람에게 일단은 머리부터 조아려보는 게 지혜라지만 그에 대한 거부감이 커 최소 그 이상은 도저히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도 교사와의 '상호존중'을 강조한다. 어차피 권위란 상대방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설정되는 것 아닌가.


공연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좋하므로 그중 라도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 뮤지컬 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것은 처세를 위한 '가면' 쓰는 연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대로 나는 연기를 못했다. 재주가 전혀 없었다. 나는 가상의 상황에서 가상의 인물을 표현해내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연기하고 춤을 추면 되는데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게 그렇게도 민망해 몸 둘 바를 몰랐다. 취미반이었는데 다른 수강생들은 나 빼고 다 잘했다. 이건 그들의 길이지 내 길은 절대 아니라는 걸 개강 초반에 바로 깨달았지만 환불이 안돼서 수료까지 했다. 그래도 토요일 오전을 통째로 할애했던 몇 달간의 도전은 내게 큰 의의를 남겼다. 나는 내 무대에서 가장 자유롭고 자신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거기선, 시시각각 순발력이 살아있고 사람들이 내게 집중할수록 에너지가 상승하지 않던가. 누구나 자신만의 영역이 있고, 그릇의 크기도 두 다르다.


해외에서 1년 만에 귀국할 때 나의 포부는 '또라이'가 되는 것이었다. 멀쩡하게 살아왔고 멀쩡한 미래가 예상되는 사람이 또라이를 가슴에 품고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니. 당시 나로선 정말 간절한 소망이었다. 내가 복귀해야 하는 곳엔 희망적인 게 정말 요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변화가 없는 곳으로 돌아가면 이전과 똑같이 살아가지 않을까, 한껏 고양된 사고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납작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컸던 것이다.


내가 100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가 속한 집단이 50만 인정하는 곳이라면 나는 나머지 50을 버리거나 다른 곳에 놓아둔 채 그 안에 입장해야 한다. 그것은 구성원의 의무이고, 체제의 전제 조건이며, 이것이 못마땅하면 본인이 퇴장하면 된다. 그런데 허용받지 못한 나머지 50이 누가 봐도 공동체 발전에 유익한 것이라면, 허용된 50에 누가 봐도 불합리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면 구성원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남들이 Yes 할 때 나도 그냥 Yes 하는 게 제일 편하다는 걸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이런 건 특히 '안정된' 집단이라 일컬어지는 곳들의 고질병인, 이때 No를 실천하는 자는 '똘끼'를 가진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내가 목표하는 또라이란 바로 그런 존재를 말한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상황 앞에서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말은 불쾌합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패기를 일컫는다. 솔직히 '될까' 싶다. 그래도 스트레스로 위염약을 처방받는 짓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으리. 그리고 누군가 슈퍼맨처럼 나타나 대신 싸워줄리 없는 냉혹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리. 건투를 빌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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