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멀어질수록 보이는 것들

이탈리아 - 피렌체(Firenze)

by 다온


피렌체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로

일본과 한국인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습니다.

우피치(Uffizi) 미술관도 있고 근처에 명품 아울렛도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지도는 원래부터 있지만

저처럼 The whole nine yards만 붙잡고 온 이들도

분명 있을걸요?

제가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더 그랬겠지만,

솔직히 그 OST 죽어가던 연애세포도 소생시키고

없던 추억도 생기게 하아요.


저는 대학생 때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2주간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밀라노와 베니스를 거쳐

마침내 피렌체에 입성했어요.

숙소에 짐을 놓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두오모였죠.

쥰세이와 아오이가 재회한 그곳.

여기서 비춰진 피렌체 시내의 풍경은 참 멋졌습니다.

사실 영화의 스토리는 제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어요.

그럴듯한 해피엔딩도, 심장이 녹을 듯한 설렘도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연애에 관해서는

제 얘기도 잘 안 꺼내고 남의 얘기도 별로 안 궁금한 사람이라서요.

심지어 책도 있고 영화도 있으면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스타일데,

활자에서 이미 접한 걸 굳이 영상으로도 보고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직접 찾아온 데까지는

도대체 떤 끌림이 있었던 건지.


'낭만의 시각화'라 하면 어떨까 싶어요.

꿈틀대는 감성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 간직하고만 있는데

누가 짜잔 하고 세상에 펼쳐놓은 느낌 말이에요.

거기에 음악이 그 파동을 증폭시켜준 거고요.

네, 제게 피렌체는 9할이 '붉은 낭만'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지만

저는 두오모에 오르지는 않았어요.

성당 바로 옆, 길 한복판에서 위를 올려다만 봤죠.

그래도 잘 보이던걸요.

여행일이 거의 한 달에 접어들면서 입장료 몇 유로라도 아껴보려는 의도가 없진 않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서 그 거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던 게 컸어요.

올라가 봤자 사람들에 치일 게 뻔했거든요.

때는, 전 세계인이 유럽으로 집결하는 7월이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생겼구나'하며 별 아쉬움 없이 발길을 돌렸어요.

이전까지 다른 성당들을 많이 돌아다녔고,

북쪽 시골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 근처 동네들에서도

이런 주황과 빨강 사이의 지붕들을 많이 봐서

'여기 꼭 들어가야 돼'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시뇨리아(Signoria) 광장을 지나 메디치가의 예술창고마저 그냥 지나치니

강이 나오더군요, 아르노강(Arno)이었어요.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베키오(Vecchio) 다리도 보이고요.

그런데 여기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강도 잔잔하고

내 마음도 잔잔하고

여기서 비로소 피렌체가 제게 다가온 것 같았어요.


그리고 노을이 내려앉을 때쯤,

저는 버스를 타고 산 중턱에 위치한 미켈란젤로 광장에 갔어요.

우와-

피렌체가 한눈에 들어오네요.

우와-

아름다워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니만큼

거리도, 건물도, 그 안의 작품들도 모두 예술의 극치지만

제가 아까 그 한복판을 거닐 땐 이 정도 감정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대상에서 멀어질수록 본질에 가까워진 느낌이네요?

제 맘속 낭만은 흘러 흘러 저 아래 아르노강까지 닿을 듯했어요.


돋보기까지 동원해서 나무를 들여다봐야 할 때도 있지만,

뒤로 물러나 숲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어요.

그 균형은 일의 성패에도, 정신건강에도 중요하죠.

저도 지금 반반 확률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이 있는데

인생을 약간만 멀리서 바라보자 생각하니 숨통이 좀 트이네요.

어느 타이밍에 숲을 보고 나무를 봐야 할지

누가 딱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꺼이 따를 건데 말입니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될 때,

저는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건 줄 알았어요.

물론 안 좋은 쪽으로요.

그런데 30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

자신의 나이 앞자리가 삼으로 변했다는 것을 용납 못하겠다는 후배들을 보면

귀여워요.

뭐든 다 가능해 보여서 부럽고요.

그런데 앞자리가 4인 선배도, 5인 대선배도 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건, 다른 누구의 조언이 아닌

본인이 직접 살아봐야 보이는 것인가 봐요.

아래만 보는 습관 때문에 목디스크가 목전까지 왔는데

이젠 고개를 들어 머얼리 바라보아야겠어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킬리만자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