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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미소에 감사

스위스 - 베른(Bern)

by 다온


대학생때 누구나 꿈꾸는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 학교가 재미도 없고 힘들기만 해서

일과 후엔 새벽까지 여행 계획을 짜며 기분을 달랬죠.

봄 내내 그랬습니다.

동기들 중에도 그런 애들이 더러 있었고

지인 중 혼자 다녀온 언니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더 용기가 생겼어요.

첫 배낭여행이었고

혼자였고

평생 이렇게 긴 여행 기회가 또 없을 것 같고

이왕 큰돈 쓰게 된 김에 본전의 몇 배는 안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저는 유럽땅을 밟은 이래 정말 열심히 이곳저곳을 누볐어요.

사실 유럽에 있다는 자체가 그냥 다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때 유레일패스의 역할도 컸어요.

만 24세 이하에게만 허락된 유스 티켓을 나도 그 시절에 이용했다는 게 괜히 뿌듯할 때가 있어요.


파리에서 첫 일주일을 보내고

이탈리아에서 대학생 봉사캠프 참여하는 일정이었는데

프랑스에서 로마로 넘어가기 전 스위스에서 3일간 머물기로 했어요.

얼마나 촘촘한 계획이었던지

매일 각각 다른 도시에서 머물렀어요.

밤에 도착해서 다음날 낮에 떠나는 식으로 정말 바빴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여행이라기보다 미션 수행이었네요.

그때 일기를 보니 스위스 일정을 그렇게 잡아놓은 것을 후회하고 있더군요.

미리 예약해둔 숙소를 취소할 수 없어 그냥 그대로 간다면서요.

지금 같으면 그런 동선을 꾸리지도 않았겠지만

만약 계획이 그랬었다해도 돈을 버리는 편을 택할텐데 말입니다.


저는 원래 길을 한 번에 못 찾고 해가 지면 겁이 나서

낯선 곳엔 꼭 낮에 도착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낮에 루체른을 구경하고 늦게 기차를 탄 터라

베른에 밤 9시가 되어서야 도착하는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의연한척 태연한척 걷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름밤을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이 거리에 점점 많이 보이니 점점 긴장이 됐어요.

그러다 50대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께 숙소가는 길을 물었는데

그분은 제 캐리어를 끌어주시며 제 손에 쥐어진 주소로 저를 데려다 주셨어요.

저는 정말 감사해서 몇 번이고 땡큐 베리 머치를 반복했어요.

게스트하우스에서 샤워실 차례를 기다리며 미국인 가족과 대화를 나눴던 게 생각나네요.

베른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씻고 잠만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동네를 한 바퀴 돌았어요.

목적지 없이 그냥 걸었습니다.

다리를 지나는데 그 아래로 에메랄드빛 아레강(Aare)이 풍성히 흘러 동화 같았어요.

제 앞으로는 벨트한 면바지에 피케셔츠를 입은 젊은 아빠가 아기를 안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왜 그리 스윗해보이던지요.


베른은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

사실 스위스의 수도여서 고른 거였어요.

어느 나라든 수도는 가봐야하고

국립 미술관과 박물관도 챙겨야 속이 시원하거든요.

그런데 이곳 수도는 북적이지도 않고

일요일이서 그런지 한적했어요.


그늘진 한쪽 길을 걷 있었죠.

그런데 아는 얼굴이 나타났어요.


오, 아인슈타인!


환한 표정의 번개 머리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친근한지요.

저는 사진을 보자마자 '천재의 미소'라 명명했죠.

모든 게 낯선 와중 드디어 익숙한 하나를 만났네요.


가이드북에서 분명 봐 뒀는데 저는 그때까지 잊고 있었어요.

아인슈타인이 여기에 연고가 있다는 걸요.

베른 특허청에 근무하면서 2년여를 살던 집이

지금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에요.

아, 상대성 이론이 그 시기 완성되었다네요.

저는 그 아인슈타인 하우스에 가진 않았어요.

스위스의 마지막 목적지, 제네바로 떠나야 했거든요.


베른에서의 시간은 만 하루도 안되지만

포근한 느낌으로 남아있어요.

어렸을 때 엄마가 '천연 DHA 우유'라 광고되는 걸 자주 사주셨거든요,

그 우유 이름의 주인공이 깜짝 나타나 저를 향해 웃어준거라

되게 반가웠던 것 같아요.

이방인에게는 그게 그렇게 기분 좋고 든든했나 봅니다.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건 꽤 좋은 일 같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얼어붙어있는 누군가를 녹여줄 수 있으니까요.

모르는 사람에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은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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