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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웅장한 하루이면 좋겠어

스페인 - 세비야(Seville)

by 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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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네가 본 건축물 중 최고가 무엇이더냐 물으신다면

저는 단연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이라 할 거예요.

가본 나라보다 안 가본 나라가 더 많으니

앞으로 대답이 달라진 가능성은 충분히 있만요.


스페인 광장이라 하면 로마의 휴일이 저 떠오지 않나요?

이탈리아인데 왜 남의 나라 이름을 붙여놨나 했더니

그곳이 옛 스페인 대사관 자리였다네요.

저도 그 계단에 앉아 사람 구경을 했었죠.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 먹던 바로 그 자리 옆에서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젤라또 먹을 기분은 안나더군요.


데 세비야에 와서 는 그 이름의 모순에서 벗어났어요.

여기가 진짜 스페인이고

이곳 진짜 스페인 광장 닙니까!


여행지에선 외국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 싶어 한국인이 많지 않은 곳을 선호하는데

세비야서 제가 묵은 게스트하우스

투숙객 절반이 한국인이었어요.

어르신 배우분들의 여행 예능에 세비야가 나온 뒤로

우리 국민들의 유입이 늘어서 더 그런 걸 겁니다.

저는 여행할 우리가 IT강국임을 특히 더 는데,

배낭여행 커뮤니티나 개인 블로그에 빠르고 자세하게 올라오는 각종 후기나 질문 답변이 경이롭거든요.

저도 리나라 여행객들이 남긴 숙소평이 좋아서 온 거라 여기에 코리안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었어요.

그렇다고 6인 도미토리에서 5명이 내 나라 사람일 줄야!

나머지 1명도 아시아인이었, 옆 호실도 이랬어요.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같은 나라끼리 묶어주는 걸 많이 봐와서 이해는 했습니다.


숙소와 스페인 광장은 그리 멀지 않았어요.

세비야에 도착한 첫날, 저는 이른 저녁을 먹고

마실 삼아 천천히 걸어가 봤어요.

세비야는 대성당이 가장 유명하니

그 외에 대해선 크게 주목하지 못했었는데요,

와 이거 뭐죠?

저는 그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소름이 끼쳤어요.

건축물에 압도당한 거예요.

우아하고 아름웠어요.

웅장했어요.

그림이 그려진 타일 장식은 얼마나 예뻤지요.

그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도 이런 강렬함까진 아니었어요.

여기도 궁전이었나, 했는데 박람회장이었다고 하네요.


저는 세비야에 머무는 3일 내내 아침저녁으로 길 찾았어요.

갈 때마다 순간적으로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며 슴이 콩닥거렸죠.

아.. 멋있다..

정말 좋았어요.

환한 낮에도, 조명 들어온 밤에도

이 거대한 구조물은 어찌 이리 가슴을 벅차게 하는지요.


네, 저는 사로잡혔습니다.

저는 무언가에 확 사로잡힌 그 감정이 좋아요.

감성의 꿈틀댐이 직접 느껴지는 그런 거요.

이렇게 가 자리를 박차고 기적으로 떠났다 오는 건

그런 간절함 때문일 거예요.

그러려고 일상의 쳇바퀴를 열심히 돌았던 겠죠.


우리에게 '소확행'이 이슈화된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이 기발한 말이 어디서 왔나, 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 <랑겔하스섬의 오후>였네요.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깨끗한 팬티가 잔뜩 쌓
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작기는 하지만 확고
한 행복의 하나가 아닐까'


문학은 시대와 국경과 세대를 넘나들어요.

옆 나라 소설가가 쓴 한 구절이

2018년 한국인의 가슴에 불을 지른 걸 보세요.

분명 그렇게 살고 있던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어디서 뚝 떨어진 새로운 삶의 방식인 마냥 우린 환호했죠.

명명화가 중요하단 걸 새삼 느낍니다.

아니면, 지친 삶에 '니가 맞다'고 언급해주는 듯한 하루키의 문장을 재조명한 것이었을지도요.


작지만 확실한 행복.

네, 저도 동감합니다.

저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카르페 디엠(Carpe Diem), Seize The Day를 주문처럼 외워대곤 했거든요.

실천을 잘했다는 건 아니고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 애는 썼습니다.


"네가 삶의 질을 중시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원하는 게 결국 뭐라는 거야?"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전화를 건 거였지만

사실은 답정너였던 내 의도를 그녀가 정확히 본겁니다.


밸런스 게임을 하자면,

저는 소한 여러 개보다

강력한 한방에 더 열광는 것 같아요.

배운 건 또 있어서 말로는 '범사에 감사'라고 하지만,

별일 없는 게 가장 별 일인 줄은 알지만,

아직까진 누군가에 의해 또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의무 없이 내 기호에 따르면 되지만,

무사한 하루하루에 만족하며 는 게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되는 걸 보니

힘 빠지기도 합니다.

분명 지지부진한 매일은 아니었지만,

기억에 꽝하고 박혀있거나

한 번쯤 스스로 으스대며 꺼내볼 수 있는 무언가가

손에 그리 많이 잡히지 않아 긴가민가 싶고요.


세비야는 길가에 오렌지 나무가 많아요.

대성당의 정원에도 오렌지 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더라고요.

제 걸음걸음을 상큼하게 만들어주었죠.

그래서 이 도시가 더 사랑스러웠어요.


저는 스페인에서 세비야가 가장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렌지 나무와 스페인 광장을

세비야의 키워드로 뽑아요.

도처에서 나를 반겨주던 동그란 주황빛과

홀리듯 나를 이끌던 금빛 자태 말예요.

둘 다 좋은데, 그중 우위라면 후자이고요.


매일 먹는 비타민C가 도대체 내게 어떤 생기를 주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큰 일을 하고 있는 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정신이 번뜩일만한 이벤트도 너무 늦지 않게 한 번씩은 인생에 터져주면 좋겠습니다.


작고 큰게 버무러져야 사는 게 더 재밌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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