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가 됐든 수도에는 가봐야 한다는 주의긴 하지만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만 아니었으면 마드리드는 애초에 계획에 넣지 않았을 거예요.
스페인엔 거기 말고도 매력 넘치는 도시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마드리드의 중심지라 하면 솔(Puerta del Sol) 광장을 들 수 있는데요,
태양의 모습이 새겨진 중세 시대 성문이 있었다고 해서 태양의 문(Gate of the Sun)이라는 뜻의 이 이름을 갖게 되었답니다.
도시의 주요 도로가 모두 이곳과 연결되어 있고 사람들에겐 만남의 장소라네요.
서쪽엔 왕궁이, 동쪽엔 프라도 미술관이 도보거리 내에 있고요.
광장 한편에는 마드로뇨(Madrono)라는 마스코트가 있어요.
산딸기를 먹고 있는 곰 동상을 말하는데
마드리드의 옛 지명이 우르사리아(Ursaria)이고 '곰의 땅'이라는 뜻이랍니다.
저는 이 광장 중심에 있는 숙소를 택했어요.
제가 밤문화는 커녕 밤에 집 밖에 있는 것도 흥미가 없고 특히 밤에는 조용하길 원해서 그런 식의 화려함 한폭판에서 잠을 청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여행정보 카페에 좋은 후기들이 올라와있고 숙소 예약 사이트의 평점도 좋고 이 정도 시설에 이 정도 가격이니 다른 델 기웃대볼 필요도 없었어요.
아참, 체인점이었고 세비야에서 머문 숙소와 같았답니다.
2박 모두 흡족했어요.
밤의 소란함이 제게 오히려 친구가 되어주었거든요.
첫째 날은 리스본에서 마드리드로 해질녁에 넘어왔는데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진입했음에도
환한 불빛과 들떠있는 군중 사이로 존재감없이 당당히 걸을 수 있다는 게 안심이 됐어요.
숙소에 짐을 놓은 뒤 제 딴엔 큰맘 먹고 밤마실을 나가봤는데
발 디딜 틈 없는 광장을 배회해보는 게 어색하지 않던걸요?
귀가 후 씻고 정리하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창밖 소음은 떠나가지 않았어요.
그때 그게 전혀 거슬리지 않았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그만큼 제 바이브가 살짝 리듬을 탔다는 얘기겠죠.
2층 침대 3개짜리 6인 도미토리였는데 저 빼고 5명은 제가 잠들 때까지 돌아오지 않더군요.
덕분에 1인실처럼 썼습니다.
둘째 날엔 그림 보는 미션을 마친 후 마구 쏘다니다 해지고는 솔 광장 주변에 있었는데
집 앞이라 그런지 불안하지도 않고 볼거리도 많아 지겹지 않았습니다.
사실 남들 밖에서 한창 노는 시간에 집에 와 잠자는 스타일이라 하루를 짧게 쓰긴 합니다.
가만, 제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시간에 그 친구들은 다 자고 있으니 하루 사용 총량은 비슷하다 봐야겠네요.
저의 마드리드 다음 목적지는 그라나다였어요.
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아주 이른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숙소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죠?
그렇게 시끄럽고 북적이고 반짝이던 수많은 광경들은 어디 가고 휑한 광장만 덩그러니 놓여있네요.
소리도 없고 사람도 없고 움직임도 없었어요.
가로등과 신호등은 계속 저 자리에서 같은 세기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 텐데도
지난 이틀동안 봐온 것보다 유난히 밝아 보였어요.
주변 장식들이 숨을 죽이니 본연의 찬란함이 드러나는군요.
단순하고 순진하게 사는 게 손해 같아도
그 본질이 빛나는 타이밍이 있고 그 순간을 포착해줄 사람이 있는 거겠죠.
지금 제가 여길 발견해준 것처럼요.
그 밝음이 아니었다면 저는 경계의 눈초리를 이리저리 보내며 티 안 나게 떨었을테죠.
그런데 고맙게도 밤하늘에 있던 별이 거리로 내려와 주었네요.
저 가로등 아래 광활한 무대를 보니
노을진 언덕에서 탭댄스를 추던 라라랜드가 떠오릅니다.
그때 음료 광고가 붙은 탑차 한대도 나타났는데요,
불 켜진 슈퍼가 하나 있던데 거기에 물건을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이었던가 봅니다.
차량은 텅 빈 공간에서 자유로이 턴을 한 뒤 홀연 떠났어요.
아마 다음 납품 장소를 향하는 거겠죠?
나는 길 떠나온, 길 떠나는 여행자요
당신은 훗날의 여행을 위해 성실한 아침을 살고 계시는군요.
가게 사장님은 아직 달이 떠있을 때 하루 준비를 마치셨으니
이제 낮의 워밍업을 거친 후 밤의 소란을 너그러이 맞이하시겠고요.
건투를 빕니다.
나이가 들수록 개인의 취향은 뚜렷해지지만
의외로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활패턴이나 호불호를 볼 때 저는 MBTI가 I로 시작하겠구나 했는데 결과는 반대였어요.
생각해보니 평소 I의 방식을 많이 차용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에너지를 응집시키는 한 과정일 뿐
결국은 E가 맞겠더라고요.
저는 직업상 높은 데시벨 속에 살다 보니 연차가 높아질수록 더 ASMR을 찾게 돼요.
그런데 이건 제 안으로 잠식되기 위한 적막은 결코 아닐 거예요.
내일을 위한 정적이라 해두죠.
잠잠한 시간이 어째 점점 길어지는 것 같긴 하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은 후엔 결국 다시 열정을 뽐내러 갈테니까요.
네, 저의 고요는 소란을 꿈꾸는 중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언의 시간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보내는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