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관사에 살았고, NMFK 018 ED호의 세대주였다. 단지 내 각 세대의 주소가 101호, 201호처럼 쉽게 되어 있지 않고 보안번호처럼 알파벳과 숫자가 섞여 있어서 외우기도 어려웠다. 초등교사용 관사가 지역 내 몇 곳에 단지로 형성되어 있는 것에 비해, 중등교사용 관사는 각 교내에 마련되어 있어서 중고등학교에 가면 마을을 하나 품고 있는 분위기가 났다. 관사의 수가 모든 교사들을 수용할 만큼 넉넉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 학교에도 매일 편도 1시간을 승용차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월세는 약 300 뿔라(약 3만 원)라서 거의 무료인 셈이고 월급에서 공제가 된다. 내가 사는 관사는 우리 학교 바로 앞에 있었고, 나는 걸어서 2분이면 출근을 했다. 우리 집과 학교 사이에는 건물이 없고 오직 드높은 하늘과 마른 평지만 있어서, 주방 창문으로 학교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다 보이고 학교 종소리도 정확하게 잘 들렸다.
관사와 우리 학교는 2008년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건설회사가 지었다. 수도에서 그 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1989년에 시작한 회사는 올해로 30주년이 되었고 우리 지역 관공서를 여러 개 지은 성공한 사업체였다. 사장님은 우리 동네에 바위가 너무 많아서 트럭으로 엄청난 양의 돌을 퍼 나르느라 땅 고르는 작업에 고생이 많았다는 일화와 더불어, 이 지역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어려움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후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었지만 심적으로 든든함은 있었다.
관사는 2층짜리 벽돌 건물로 네 세대가 한 블럭을 이루고 낮은 펜스가 둘러져있다. 각 세대는 20평대로 방 2개, 화장실, 욕실, 주방, 거실로 구분되는 구조이다. 우리 집은 1층이었는데 물을 밖에서 길어다 쓰는 입장에서 이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집안에는 약간의 냉기가 흘렀다. 밖은 뙤약볕이어도 현관문을 열면 에어컨을 틀어놓은 듯 시원했고, 각 방과 거실 천장에 있는 빌트인 대형 선풍기를 한여름에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겨울에는 추웠다. 이 집은 여름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보츠와나는 세 달 정도의 겨울을 빼면 나머지 아홉 달이 모두 한여름이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관사에 사는 3~7세 예닐곱 명의 꼬마들은 항상 우리 앞집에 모여서 놀았다. 아이들이 뛰노는 풍경은 동네에 활기를 주고 정겨움을 느끼게 해서 나는 이들이 등장하는 오후가 좋았다. 세츠와나로 쫑알대는 목소리는 시끄럽지 않은 정도의 데시벨이고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이라, 나는 마치 티비를 낮은 볼륨으로 틀어놓은 듯한 느낌으로 이를 배경 삼아 집안에서 내 일을 했다. 놀다가 누군가 울지만 않는다면 그 잔잔한 흐름은 깨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뭇가지, 돌, 과자봉지, 병 등 주위에 흩어진 혹은 버려진 것들을 주워다가 소꿉놀이를 하거나 게임을 만들어서 하거나 문자 그대로 땅을 파며 놀았다. 집 앞에서 왔다 갔다 달리기를 하거나 동네를 우르르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했다. 맨 발이 편한지 신발을 아예 신고 나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나의 꼬마 이웃들은 이렇게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항상 나를 흐뭇하게 했고 내가 이 마을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지금 우리나라 아이들은 보호자 없이 집 밖을 나다니는 것도 위험하고 학원 스케줄 때문에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없는데, 이렇게 또래와 상호작용하며 사회성도 기르고 놀 거리를 서로 궁리하면서 창의성도 계발하는 우리 동네 꼬마들을 보니 자연스러운 성장이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관사에 사는 이웃들은 거의 우리 학교 교사들이고, 타 초등학교 교사들과 이 지역 공무원들도 있었다. 집들의 출입문은 도끼로 한 번만 제대로 강타하면 부술 수 있을 만큼 허술한 나무문에다 열쇠 구멍 하나짜리 잠금장치만 있어 불안했지만 나도 남들처럼 그대로 살았고 끝까지 무탈하게 지냈다. 보츠와나가 안전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치안이 예전 같지 않다며 수도의 교민들은 항상 주의를 당부하셨는데, 내 발령지는 시골이라 도시의 험악함과는 상황이 달랐고 우리 관사는 마을의 제일 구석에 있기 때문에 택시 기사들 외에는 외부인도 거의 오지 않았다. 이웃들이 모두 신분이 확실한 공무원에다 대부분 일가족이 함께 살고 있어 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안전에 대해선 부담을 덜고 살았다. 물론 동네를 괜히 어슬렁거리며 다니거나 해가 진 후 집 밖에 나가는 일은 전혀 없었다.
우리 동네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우리 집이 관사 맨 끝 집이라 집 옆은 바위 더미와 부시, 학교로 이어지는 통행로가 있는데 등하교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가는 사람도 드물어 한적했다. 우리 동네는 고도가 높은 평지이고 건물들의 높이는 최대 2층이고 서로 띄엄띄엄 있기 때문에, 해가 동쪽에 떠서 서쪽으로 질 때까지의 전 과정을 어느 방향에서든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입주 후 한동안 매일 마당에 나가 일출을 즐겼다. 보츠와나 관공서의 업무 개시는 7시 30분으로 우리나라보다 1시간 반 정도 하루를 빨리 시작하기 때문에 출근을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여름이면 새벽 4시 반쯤 마당에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아직 별과 달이 떠 있는 까만 하늘을 쳐다봤다. 그 적막이 주는 평안은 정말 감동이었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서서히 까만색이 옅어지다가 붉은빛이 피어오르고 점차 하늘이 밝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떠올랐다. 광명과 파란 하늘이 등장하는 순간, 그때부터 열기도 시작됐다. 이 모든 과정은 5시 반이 되기 전에 다 끝나는데, 이는 부지런한 자만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거실에서 가만히 밖을 내다보면 아무 잡음도 없이 하늘, 바위, 부시, 모래만 있었다. 우리 집에 살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랬다. 그럼 나는 시공간을 초월한 듯 여기가 어디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지구 외딴곳 오두막 한 칸에서 세상과 동떨어져 살았던 그 날들은 힘들었지만, 나는 그 진한 고요함에 행복했고 이것은 내게 노스탤지어로 남을 것이었다.
거실에서 밖을 바라보면 이런 단순함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