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품위유지 의무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나는 보츠와나에서 국적과 직업이 명확한 외국인 신분이므로 외모와 행동에도 마땅히 신경을 써야 했다. 프로의 세계에 몸 담은지도 꽤 되니 나의 임무에 대해 더 설명이 필요치는 않겠고, 에티켓 정도는 갖춘 교양인이니 남의 눈살 찌푸리게 하지 않을 자신은 있고, 이제 어떤 스타일의 의복을 갖출지만 출국 전에 결정하면 됐다. 수하물 무게 제한에 맞춰 옷과 신발을 추려야 했기 때문이다. 짐은 최소한, 치장은 생략, 결론은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래서 나는 심플한 출근용 복장들로 최종 짐을 꾸리게 됐다.
보츠와나에 도착한 1월은 한여름이었다. 근무 첫 몇 달간은 출근할 때 세미 정장에 구두에 화장까지 나름 단장을 했고, 햇빛이 뜨거웠지만 머리 눌리는 게 싫어서 모자도 쓰지 않았다. 여름용 옷들은 얇고 가벼워서 몇 가지 코디로 돌려 입을 정도는 챙겨 갔는데, 사람들은 내가 새로운 옷차림으로 등장할 때마다 예쁘다고 해주고 옷도 한 번씩 만져봤다. 그중 가장 관심을 받는 건 나의 곧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러다 6월 말, 겨울이 왔고 나는 출근할 때 뭘 입어야 하나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방한용 옷이 무겁고 부피가 커서 패딩 점퍼와 기모 츄리닝 한 벌만 챙겨왔는데, 예상보다 너무 추웠다. 내가 아프리카의 겨울을 우습게 봤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비니를 쓰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하고, 어그부츠를 신을 줄은 정말 몰랐다. 겨울옷을 사려고 몇 번 둘러하다가 사고 싶은 것도 없고 비싸기만 해서 그때부터 내 복장은 극도로 단순해지고 반복되었다. 패딩에 구두를 매치할 수는 없으므로 운동화를 신고, 우리의 다이소쯤 되는 체인점 'PEP'에서 산 베이지색 사파리 모자를 교복처럼 매일 썼고, 정장은 자취를 감췄다. 얼굴은 무색의 선크림을 두껍게 바르는 것까지만 하고 화장도 멈췄다. 내 피부가 지난 몇 달간 고온 건조한 환경에 너무 예민해져서 최대한 자극을 피하려던 게 주목적이었지만, 내 연한 색조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회생활 '예의'로서의 화장도 충분히 생략이 가능했다.
사람많은 수도에 갈 때도 나는 평소처럼 모자에 운동화, 맨 얼굴로 다녔다. 한국에서는 누가 보든 안 보든 민낯으로 외출하면 괜히 움츠려들지만, 보츠와나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남의 이목이나 어쭙잖은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덕분에 나는, 비록 거울에 비친 초췌한 내 얼굴이 눈에 거슬릴지언정 마음까지 불편해지진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많이들 ‘White’로 표현했다. 나도 어디가면 차별받는 유색인종인데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본의 아니게 백인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 같아 괜히 민망하기도 했다. 관념상 이들에겐 블랙 아니면 화이트이고, 본인보다 피부색이 밝으면 다 화이트의 범주에 넣은 것뿐인데 말이다. 흑인이나 아시아인이 흰 피부를 동경한다면, 백인들은 태닝을 하면서까지 구릿빛 건강미를 추구하기도 한다. 미의 기준이란 게 이 얼마나 상대적인가. 나와 타인의 기준이 다르므로 애써 어떤 선에 맞출 필요도, 맞출 선 자체도 불분명하다는 걸 망각하는 순간 우리 삶은 괴로워진다.
한국에서처럼 예쁜 옷과 액세서리, 화장, 하이힐까지 완벽한 모습으로 출근한다는 파견 동료가 있길래 내 상황을 얘길 하면서 대단하다고 했더니 교직원들이 모두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학교라 자신도 그럴 수밖에 없고, 해보니 꾸미는 게 기분 전환도 된다고 했다. 단조로운 일상에 재미를 주는 뭔가가 하나라도 더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우리 학교는 시골이라 그런지 직원들도 다들 소박하고, 나는 청결에는 민감해도 스타일링에는 무심해졌으니 깔끔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고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로서는 외모지상주의에서 잠시라도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게 보츠와나에 사는 동안만 누리는 ‘한시적’ 혜택일지라도 감사하다. 왜냐면 여기서 경험한 새로운 삶의 방식은 한국에서도 잊지 않을 것이고, 이 행복을 한 번 맛본 나는 한국 사회에 맞게 최소한의 실천이라도 하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토요일, 스퀘어마트에서 오이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여기 오이는 우리의 두세 배 크기로, 가격은 개당 천 원 정도였다. 산처럼 쌓인 오이 더미에서 크고 곧은 걸 찾겠다고 하나씩 고르고 있는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마트 직원이 무슨 말을 할지 뻔한 표정으로 웃으며 다가왔다.
- sister 있어요?
/ (갑자기 웬 시스터?) 네.
- sister 결혼했어요?
/ (신선한 질문이군) 네.
- 유 아 뷰티풀.
/ (또 시작인가?) 땡큐.
- 결혼했어요?
/ (대화가 길어질 것 같다. 빨리 끝내자) 네.
-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 (순간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귀여운 청년일세) 가서 열심히 일이나 하시죠.
- (억울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맨날 일 열심히 하는데..
'예쁘다, 결혼하고 싶다'는 보츠와나 남자들이 외국인 여성 누구에게나 던지는 단골 멘트이다. 평소엔 그런 그들에게 눈길도 안주고 지나치는 나인데, 그 날은 눈과 손을 오이에 두면서도 짧게라도 대꾸를 했고 상대의 말이 재밌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 동생뻘인 그 앳된 직원이 하는 말들은 왜 그리 다 현실감이 없던지. 뜬금없는 시스터 얘기에, 수척한 내 얼굴에 뷰티풀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결혼을 했다는데도 결혼하고 싶다 하고, 가서 일이나 하라고 타이르듯 말하니 꾸중 들은 애처럼 휙 사라졌다. 장 본 물건들을 트렁크에 싣고 운전석에 앉았는데, 문득 아까 그 청년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로 한국 예능을 볼 때 외에 내가 현실에서 소리 내어 웃어본 게 얼마만인가. 지치고 무미건조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수도에 간 내게 그는 1분여동안 강한 엔돌핀을 선물하고 갔다. 나는 속으로나마 그에게 행운이 깃드는 하루가 되길 빌었다. 그 후 마트에 가도 그를 다시 보진 못했는데, 길에서 마주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의 동그랗고 밝은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10월 쯤 되니 내 양말 대부분이 마치 훈장처럼 구멍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새 양말로만 시작했던 보츠와나 생활이었는데 내가 이 정도로 열심히 신었나? 아니면 손빨래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건가? 우리나라였다면 발견 즉시 꿰매거나 버렸을 테지만, 어차피 귀국할 때 다 버리고 갈 거라 그때까지만 깨끗하게 신자는 생각에서 구멍이 살짝 보여도 방치했고 밖에서 신발 벗을 일도 없고 누구에게 양말 보일 일도 없으니 더 무심해졌다. 나중에는 한국인들에게 구멍을 들켜도 민망하지 않고 '여기는 아프리카니까'가 나의 웬만한 빈틈들을 메워 주리라 믿고 넘겼다. 이렇게 헐렁한 마음으로 살아보는 것도 큰 경험이라 생각한 것도 있다. 한국에서는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 무렵 아침 조회시간에 교복 왼쪽 팔꿈치가 크게 해진 3학년 남학생이 눈에 띄었다. 늘 자신감이 넘치고 내 수업시간에도 열심인 아이였다. 그러고 보니 내 양말은 명함도 못 내밀만큼 구멍이 뻥 뚫린 옷들이 도처에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이만큼 낡은 옷을 볼 일도 없고, 혹시라도 티 묻은 옷을 입고 나왔다면 이를 어떻게든 가리려고 안달일 텐데 여기서는 별 일도 아니고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외적으로 말끔하지 않고 몸에 냄새가 나도 누구하나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다. 그건 아마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너만 그런 것도 아닌, 우리 모두가 당면한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만 잘 나오면, 외모와 복장을 꾸밀 여건이 조금만 더 허락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겠지. 그래, 건강과 미풍양속을 크게 해치지 않는 한 모두가 적응해온 방식과 모습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유연해지고 나를 둘러싼 상황들이 조금은 더 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