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이 확정된 후 사람들은 내 행선지를 물었고 내가 보츠와나(Botswana)라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신기하게도 똑같았다.
- 나 보츠와나 가
/ 어디 있는 나라야?
- 아프리카
/ 나라 이름이 뭐라고?
- 보츠와나
/ 보츠'나와' 처음 들어봤어
- 보츠'와나' 야
/ 응. 보츠'나와'
- ‘나와’가 아니고 ‘와나’라고!!
대륙 자체가 미지의 세계인데, 유적지나 사파리로 유명한 국가도 아닌 보츠와나가 귀에 익을 리 없다. 나도 파견 지원서를 쓰기 전까지는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여서 처음엔 사람들과 똑같이 헷갈려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궁리를 해봤는데 오키나와가 떠올랐다. 보츠‘와나’는 몰라도 오키'나와'는 익숙하니 보츠'나와'로 자동 인식되는 게 아닐까 하고. 지금도 포털사이트에 보츠'나와'라고 검색하면 이 틀린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는 뉴스나 여행 후기가 많이 뜨는데, 이것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올바른 지식을 선별해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단적인 예가 된다. 레파토리가 뻔한 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땐 나라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그냥 “저 아프리카 가요”라고 하는데 그럼 사람들도 “아프리카 가는구나” 하고 끝이었다. 어느 나라냐고 묻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아프리카'를 대륙의 이름이 아닌 개별 국가 이름으로 사용하는 오류를 흔히 범하기도 한다. 유튜브에 ‘Africa is not a country’, ‘Is Africa a country or a continent?’ 등의 콘텐츠가 많은 걸 보면 전 세계인이 그런가 보다.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으로 UN 기준 54개의 독립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든 국가들을 하나로 묶어 ‘아프리카 사람, 아프리카 문화’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맞지 않다. 아프리카가 우리에게 낯설고 그 이름 자체가 주는 존재감이 크기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개개에 대한 존중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인식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말을 쉽게 하려다 보면 그냥 '아프리카'라는 통칭을 쓰게 되는데, 단어 선택에 더 신중을 기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보츠와나로 출국하기 전에 나는 이 생소한 나라에 대해 배경 지식을 얻으려고 포털사이트와 유튜브를 뒤졌지만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지도상으로만 봐도 보츠와나는 남반구에 위치한 아프리카 남쪽 나라로 좌로 나미비아, 우로 짐바브웨, 위로 잠비아, 아래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 국가에다 넓은 사막을 끼고 있어서 위치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살기에 쉽지 않아 보였다. 한글로 검색하면 보츠와나 특정 관광지에 대한 배낭여행 이야기가 거의 전부였고 영어로 구글링을 하면 그나마 유의미한 정보들이 떴는데, 위키피디아의 기본적인 국가 소개와 함께 보츠와나가 에이즈, 다이아몬드, 민주주의로 세계 순위에 이름을 올린다는 게 핵심이었고 시청각 자료로 쓸만한 보츠와나 배경의 영화도 검색되었다. 나는 딱 그 정도의 지식만으로 현지에 왔고, 살면서 보니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이 생기고 낱개의 지식들에 살이 붙어갔다. 보츠와나를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면서 자세한 것들이 궁금해지고, 이것을 영어로 구체적으로 구글링을 하게 되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정보들이 내 눈 앞에 등장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서도 통했다. 만약 보츠와나에 오기 전의 나처럼 이 나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나는 아래의 다섯 가지를 가장 먼저 말해줄 것 같다.
1. HIV/AIDS : 인구의 20% 이상이 감염되었고 2019년 현재, 옆 나라인 에스와티니(Eswatini), 레소토(Lesotho)에 이은 세계 3위의 감염률을 보이고 있다. HIV/AIDS 교육이 초등학교부터 정규 과정으로 편성되어 있고, Peace Corps의 많은 인원도 이와 관련해 학교나 의료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질병의 예방과 치료 상황이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국가의 미해결 과제이며, 저 통계상으로는 내가 길에서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도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건데, 겉으로는 전혀 그 사정을 모르니 실감은 안 났다.
2. 다이아몬드 : 보츠와나에는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고 국가 경제는 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다른 나라가 광물 때문에 내분을 겪은 것에 비해 보츠와나는 철저하게 국가가 관리함으로써 나라의 균열을 막았다고 한다. 나는 보츠와나에서 다이아몬드를 한 번이라도 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박물관이나 보석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의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자국의 대표 산업인데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싶지만 일반인에게 보석은 삶과 동떨어진 얘기라 모르는 게 당연한 것도 같다.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동네인 Jwaneng은 우리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인데, 그 지역에 근무했었던 우리 학교 교사들도 광산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했다. 다이아몬드를 품은 곳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가보려고 했는데 광산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고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다고 해서 시도하지 못했다.
3. 민주주의 : 보츠와나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 조직의 부패 지수가 가장 낮은 국가로 정부 기관 곳곳에 'Corruption is flammable'같은 강력한 반부패 포스터가 붙어있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국정 운영, 치안, 재정이 안정적인 덕분에 외국인으로, 특히 봉사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심적 부담감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적다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현재 다섯 번째 대통령인 Mokgweetsi Masisi 대통령이 재임 중으로, 관공서는 물론 모든 개인 사업장에는 대통령 초상 사진이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걸려있다. 10월 23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캠페인 풍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했고, 여당인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다. 정부가 투표율을 올린다는 명목으로 선거 한 달 전에 갑자기 선거가 있는 주의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포퓰리즘 논란이 있었고, 투표하러 고향에 가는 사람들로 도로가 붐볐던 게 기억에 남는다.
우리 학교에는 교장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대통령 초상 사진이 걸려있어요
4. 부시맨 : 아프리카 원주민이라 하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가 부시맨인데, 영화 부시맨(The gods must be crazy)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들이 터전이 바로 보츠와나 서쪽의 칼라하리(Kalahari) 사막이다. 16세기 아프리카 남단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식민자들이 '부시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그들을 '부시맨'으로 불렀으며 비하의 의미가 담겨 오늘날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원래 명칭은 코이산(Khoisan), 더 정확히는 산족(San)인데 인류학적으로는 백인, 황인, 흑인으로 분화되기 전 세계 최초의 고대 인류라고도 한다. 자연보호를 명목으로 정부가 강제 이주 정책을 펴게 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역사가 있고, 이들은 생김새가 흑인들과 달라 보통의 보츠와나인들과 쉽게 구별된다.
5. 세레체카마(Seretse Khama) :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으로, 베추아날란드가 영국의 보호령에서 벗어나 보츠와나로 독립하는데 공헌하신 분이다. 그의 생일인 7월 1일이 공휴일(Sir Seretse Khama Day)이고 그의 이름이 수도 가보로네 공항(Sir Seretse Khama International Airport)의 이름이 될 만큼 보츠와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며, 보츠와나의 4대 대통령인 이안 카마(Ian Khama)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화 오직 사랑뿐(A United Kingdom)은 세레체카마 대통령과 그의 영국인 아내의 이야기로 인종 차별뿐만 아니라 보츠와나의 역사, 문화, 풍경 등을 접할 수 있어 내가 이 나라에 대한 배경 지식을 쌓는데 많은 도움을 되었다. 영화의 배경이 몇십 년 전이지만 사람들의 모습과 자연환경이 내가 살아가는 보츠와나 현재의 풍경과 매우 비슷했다. 치마와 숄과 두건을 두른 전통 스타일의 여성들, 흙과 짚으로 지어진 둥그런 형태의 전통 가옥들, 자유롭게 활보하는 동물들, 사막과 부시로 가득한 국토 등 보츠와나의 옛날을 간직한 환경에 둘러싸여 나는 오늘을 살았다. 십 년 뒤에 다시 와도 우리 동네는 이 모습 그대로 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