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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무게와 추억의 상관관계

내 짐을 챙기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by 다온

한국의 파견 기관은 파견자들에게 왕복 항공권을 제공하며 올해 보츠와나팀은 카타르항공을 이용했다. 우리가 타는 노선의 위탁수하물 기본 허용치는 30kg였다. 이는 1년 치를 싣고 가는 나에게 짐을 쌀 때 엄청난 우선순위 전쟁을 치르게 했다. 수하물 초과분에 대해 체크인 카운터의 직원들에 따라 조금 봐주기도 하고 얄짤없이 과금하기도 하는데, “저 아프리카에 봉사하러 가는 건데 조금만 봐주세요”하고 사정해서 통과된 타기관 봉사자도 있다지만 나도 그런 운을 바라며 감정을 소모하기에는 예정된 나의 여정이 너무 길고 피곤했기 때문에 그 방법을 고려하진 않았다. 다행히 수하물 초과분을 미리 구입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항공사 한국지사에 전화해 5kg를 56100원에 구입하게 됐다. 더 무거워지면 내가 가방을 운반할 수가 없으므로 딱 그만큼만 추가했다.


그렇게 해서 동생이 코이카 갈 때 썼던 이민가방에 35kg 맞추기 미션이 시작됐다. 이 가방을 다시 쓸 일이 생길 줄 몰랐는데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내가 싫어하는 레오파드 무늬지만 체크인과 동시에 이리저리 던져질 가방을 내 취향에 맞춘다고 또 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차곡차곡 짐을 넣었다. 그런데 꼭 필요한 것만 고르고 골라도 무게는 초과였다. 며칠 동안 짐을 쌌다 풀었다 인고의 시간을 보냈고, 요령 없이 대충 하는 나 대신 결국 엄마와 동생이 이 고생을 맡아줬다. 아쉽게도 가방 입성에 탈락한 물건들은 나중에 우체국 국제소포로 받기로 하고 무게 조정에 타협했다. 저울 위 가방이 35에 딱 맞았을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비록 짐 싸는데 공헌한 바가 없는 나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짐과의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서 가방 하나당 32kg을 넘을 수 없다고 했다. 왜 나는 그걸 몰랐던가. 공항 한쪽에서 부랴부랴 이민가방을 열어 3kg을 옮기려고 보니 제한 무게 7kg를 이미 채워온 기내용 캐리어에는 더 이상 넣을 수가 없었다. 당장 쓸 일 없는 것들로 최대한 추려내어 집으로 다시 보내기로 했고 엄마와 동생은 그날도 진을 뺐다. 나중에 보니 몇 킬로그램이 추가됐는데도 무사히 통과한 동료들이 있었다. 나도 다른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했으면 좋았을걸 싶었지만 수속은 이미 다 끝났고, 그 밤늦은 시간까지 공항에서 짐 전쟁을 치르고 바삐 돌아가던 엄마와 동생의 뒷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다. 그렇게 나는 가방에 내 일 년을 싣고 보츠와나에 왔다.

2019.1.6. 보츠와나 일 년 살이를 함께 할 물건들을 여기에 싣고 왔죠

본격적인 현지 생활이 시작되니 짐 쌀 때 몇 번을 넣다 뺐다 결국 빼버린 것 중 아쉬운 것들이 하나씩 생각났다. 웬만한 것은 현지에서 사서 쓰려고 했지만 아예 팔지 않는 것들도 있고 고무장갑, 일회용 봉지 등 사용감이 도저히 맞지 않는 것들도 있어 이것들을 다 적어 엄마께 리스트를 보냈고, 엄마는 15kg에 맞춰 보내주셨다. 소포는 온라인으로 배송 상황이 조회되었는데 남아공을 거쳐 보츠와나 수도 가보로네에 도착한 것까지만 확인이 되었다. 보츠와나 내에서는 더 이상 업데이트가 안되어 과연 이 시골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마침내 2월 14일, 소포가 동네 우체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학교로 왔다. 나는 학교 청소를 담당하시는 아주머니와 함께 차로 10분쯤 걸리는 쇼핑몰로 갔다. 거기에 학교 사서함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사서함에 배달된 모든 우편물들을 꺼내셨고 그중 내 소포가 도착했다는 서류를 따로 챙기셨다. 우리는 우체국으로 갔고, 챙겨 온 서류와 수수료 8 뿔라(약 900원)를 낸 후 드디어 내 박스를 받았다. ‘DIPLOMATIC’이라고 적힌 테이프로 단단히 묶인 파란색 상자였다. 이 먼 길을 무사히 왔구나. 배송은 3주 정도 걸렸고 박스의 외관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집에 와서 두근대며 박스를 개봉했다. 내가 원했던 물건들이 모두 들어있었고, 꼼꼼하신 우리 엄마가 얼마나 정성껏 포장하고 정리하셨는지도 한눈에 보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마음인지 '이게 20만 원 넘는 배송료를 들일 일이었나, 진짜 꼭 필요한 것들이 맞나' 하는 허전함이 몰려왔다. 대충 해도 되는데 엄마는 뭘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 써서 보내신 건지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어쩜 몇 박스가 왔어도 그런 감상에 빠졌을지 모른다. 어차피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외로움의 콜라보라 할까. 이후로 나는 한국에서 더 이상 국제 소포를 받지 않았다. 더 많은 돈을 내고 더 적은 만족을 얻는 소비일지라도 현지에서 타협하며 살기로 했다.

2014.2.14. 사서함에서 우편물을 꺼내고 계십니다
우체국1.png 우리 동네 우체국

보츠와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짐 가방이 텅텅 빌거라 생각했는데, 웬만한 물건들을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새로 사가는 물건이 별로 없는데도 이민가방은 꽉 찼다. 귀국행 위탁 수하물 한도도 30kg으로, 이번에는 저울이 없으니 감으로만 맞춰야 했는데 공항에서 재보니 31.3kg이었고 아무 문제없이 통과되었다. 미니멀리즘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원래 많은 물건을 가지지 않은 편이고 여행 갈 때도 기내 수하물 허용치까지만 챙기는데, 이번엔 여행이 아닌 장기 '거주'이다 보니 나와 함께 떠나왔다 다시 돌아가는 물건들이 많았다. 그래도 가방 하나에 다 넣어질 정도면 꽤 잘 간추렸다 싶다. 물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머리와 마음에 담아 가는 기억이며, 잊어버릴 것을 대비해 사진과 동영상으로 외장하드에 잘 챙겨놨다. 가볍게 짐을 꾸리듯, 몸과 마음도 언제나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2019.12.30. 저의 일 년을 담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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