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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언 Sep 15. 2019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나요?

이 글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분들을 위해 쓴 글입니다. 읽기 전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나요? 어떻게 보지도 않고 믿을 수 있죠? 그건 너무 어리석인 일 아닌가요? 그리고 왜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죠.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시면 되지 않나요? 그러면 사람들이 더 많이 믿을 것 같은데요. 전 보기 전에는 못 믿겠어요.


철학자 데카르트는 어느 날 이른 아침 산책을 나갔다. 매일 다니던 산책길을 따라 걷던 중, 길 위에 뱀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오던 길을 되돌아 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도 산책을 나갔는데, 어제 본 뱀이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이 본 것은 뱀이 아니라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본 것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경험에 통해 얻은 지식의 확실성"에 대해 하나하나 의심하고 검증해 가기 시작했다. 이런 감각적 경험에 대한 의심을 기록한 책이 유명한 <방법 서설>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때로는 직접 눈으로 본 것도 믿기 어려운데, 어떻게 보지도 않고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하나님을 무작정 믿을 수 없다고, 보아야만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믿음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공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공원에 나무가 있다."고 말하지, "나는 공원에 나무가 있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있다"고 말하지 "믿는다"고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돈이나 집, 먹을 것이나 입을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가장 불쌍한 사람일지 모른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은 대부분 사랑과 우정, 꿈과 이상, 명예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시간과 노력, 열정을 쏟는 대상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흔히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근거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감각으로 획득하는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빛은 너무 어두워도 볼 수 없지만, 너무 밝아도 볼 수가 없다. 소리가 너무 작아도 들 수 없지만, 동시에 너무 커도 들 수 없다. 빛 가운데는 가시광선이 있는데, 가시광선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광선을 말한다. 반대로 자외선과 같이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광선도 있다. 비록 눈으로 볼 순 없지만, 자외선은 분명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스스로 자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데, 이 때 엄청난 굉음을 내며 움직인다고 한다. 우리가 듣지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소리들이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셋째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럼 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이 이땅에 실제로 존재하셨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특히 4대 성인 중의 한 명으로 꼽을 정도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인류는 존경을 보여 왔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년대를 기원전(B.C.)과 기원후(A.D.)로 나눌 정도로,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즉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 당시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유대사회에서는 신에 대한 경외심이 매우 컸으며,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함부러 부르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시의 가치관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 예수님의 주장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도 결국에는 신성모독,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유대문화에 조예가 깊은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까지 팔레스틴의 유대교에서 한 개인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칭한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 고대 유대교의 문헌이나 기도문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이렇게 부른 경우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할 때마다 이 표현을 쓰셨다.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불경한 태도이며, 따라서 이렇게 친밀한 단어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에른스트 르낭은 자신의 책 <예수의 생애>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얼마나 훌륭했으면 인간 중에 얼마나 인간다웠으면 제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생각했겠는가?” 제자들이 인간에 불과한 예수님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신격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존경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존경한다고 신이라고 부르고 경배하진 않는다. 특히 당시 사회문화적 배경 아래에서는 더욱 불가능했다. 제자들이 이렇게 고백한 이유는 한 가지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왕과 같은 지도자들이 자신을 신의 아들로 선포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다. 그가 자란 나사렛은 로마 제국의 끄트러미에 있는 궁벽한 마을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살지 않는 사람은 나사렛이라는 이름을 들어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곳 출신인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 특히 유일신을 믿는 사회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그럼 이런 예수님의 자기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왜 예수님은 죽음을 무릎쓰고 이런 주장을 펼쳤을까? 예수님이 미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착각하셨을까? 아니면 거짓말쟁이라서 일부러 사람들을 속인 것일까? 그렇다면 인류는 희대의 미치광이나 사기꾼을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미치광이나 거짓말쟁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를 직접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은 신실하고 겸손하신 분이었다고, 그분이 가르침과 삶은 진실했다고 증언한다. 이는 예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도 동일하게 고백하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일들을 보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한 일들 중에는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다. 무엇보다도 죽은 자를 살리셨고 스스로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1)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왜 나타나지 않냐"고 "하나님이 눈 앞에 나타나면 믿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고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나님을 실제로 보았지만, 믿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보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일지 모른다. 보지 않고 믿지 못한다면, 보아도 믿지 못할 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불과한 한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면, 그는 위대한 성인으로서의 인격을 갖춘 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삶은 달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은 수준의 미치광이거나 혹은 마귀일 것이다.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미치광이, 혹은 더 나쁜 사람일 수 있다. 당신은 그를 미친 사람 정도로 치부하거나, 마귀라고 부르며 침을 뱉거나, 그 발 앞에 엎드려 주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성인이라고 선심 쓰는 듯한 어리석은 생각은 접어 두라. 그는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_ 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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