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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언 Sep 20. 2019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할까요?

이 글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분들을 위해 쓴 글입니다. 읽기 전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너무 독선적이예요.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자기들만 옳다는 사고방식은 위험해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지 않나요? 그리고 신은 인간에게 복종을 강요하잖아요. 결국 신의 존재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 아닌가요? 자유야말로 인간됨의 가장 중요한 가치 아닌가요.


기독교는 독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른 종교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거나 불손하게 대하는 태도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또한 다른 종교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는 것 역시 잘못된 태도다. 다만 기독교가 진리를 가르친다고 독선적이거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참된 자유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첫째로 기독교는 문화적 수용성이 크다. 


이슬람의 경우 인구의 절대 다수가 발원지인 중동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 유교 역시 인구학적 중심이 발생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기독교는 초기에는 유대인들이 주도했지만, 곧이어 지중해 연안의 유럽인들이 신앙을 받아들였고, 차츰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대다수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 거주하며, 그 중심이 남반부와 동반부로 옮겨지고 있다. 다른 종교나 세계관에 비해 기독교는 휠씬 다양한 지역,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기독교는 그만큼 자유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분명 기독교에는 지역과 환경에 상관없이 분명히 가르치는 핵심적인 진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믿음을 표현하는 형식이나 방법에 있어 커다란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특정 문화권의 믿음의 양식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출신학자인 라네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아프리카인들을 다시 빚어진 유럽인이 아니라, 새로워진 아프리카인이 되게 해 주었다." 


흔히 기독교를 다른 나라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럼 기독교는 어느 나라의 종교일까? 기독교는 발생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단순히 전파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이 빚어져 왔다. 초창기 서구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해줬지만, 이제는 서구의 교회가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배우기도 한다. 기독교는 히브리 문화와 그리스 문화, 유럽 문화에서 배운 통찰들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지금은 그 위에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 문화에서 배운 통찰들을 더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기독교는 계속해서 더 많은 문화권, 더 많은 지역, 더 많은 계층에서 받아들여질 것이고,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빚어질 것이다. 그 결과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폭넓은 시각'이 될 것이다.


둘째로 참된 자유는 바른 관계에서 누릴 수 있다.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권위나 전통보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 의지하는 것을 계몽된 인간의 조건으로 꼽았습니다. 자유야말로 인간됨의 가장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어떠한 구속이나 제한도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할까? 물고기는 물 밖이 아니라 물 안에 있을 때 자유롭다. 물에게 구속받기 싫다고 물밖으로 나간다면, 물고기는 이내 죽고 만다. 물고기는 물이라는 구속 안에서 오히려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새도 마찬가지다. 새도 하늘이라는 환경안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 자유란 어떠한 구속이나 제한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올바른 한계, 즉 자유를 주는 구속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더 큰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물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는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흔히 자유라고 하면 "~으로부터의 자유"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억압과 구속이 사라질 때 우리는 자유함을 느낀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를 향한 자유"다. 감옥에 갇힌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가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간 후 갈 곳이 없다면 어떨까? 이내 감옥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감옥이라는 구속이 없어졌다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주인공 앤디의 감옥생활과 탈옥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는 앤디의 친구로 레드가 등장한다. 레드는 우여곡절 끝에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나가게 된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던 레드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목을 매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대들보에 "브룩스 여기에 있었다.(BROOKS WAS HERE)"라는 글씨를 발견하게 된다. 브룩스는 레드처럼 가석방 후 갈 곳이 없어 결국 그곳에서 자살을 했던 것이다. 왜 감옥에서 나온 그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할까? 결국 "~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어지만, "~을 향한 자유"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경우에 참된 자유를 누릴까? 오늘날 젊은이들 중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자유를 누리며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그 반대에 가깝다. 인간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갈 때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자유로워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지음 받았다. 


셋째로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되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남은 생애를 돼지 우리에서 돼지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돼지들을 섬기고 돼지들을 대신해서 도살장에 끌려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지렁이가 되어 평생을 땅위를 기어다니며 누군가의 발에 밟혀 죽을 운명이 되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그만큼 큰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왜 예수님은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고 인간이 되셨을까? 이는 인간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한다. 흔히 신은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의 섬김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반대에 가깝다.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를 제한하고 낮아지셨다. 가장 낮은 곳으로 저주와 절망의 자리로 내려가셨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분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_ 요한복음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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