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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언 Oct 25. 2019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요?

기독교인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서 타락했다고 말하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선악과를 안 만들었으면 인간이 타락할 일이 없지 않나요?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요? 일부러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을 시험하신 것인가요? 그건 너무 옹졸한 방법 아닌가요. 굳이 그렇게까지 인간을 시험하셔야 했나요?


예전에 사관학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사관학교에 입학한 생도들은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 훈련소의 연병장에는 종이 하나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의 용도가 특이했습니다. 생도들 중에 훈련과정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이 종을 치게 되면, 사관학교를 떠나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 종을 침으로 생도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냐고 질문합니다. 선악과는 훈련소에 있는 종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더이상 하나님과 함께 있길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하나님을 떠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 싫은데, 억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옳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선악과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훈련소에서 더 이상 훈련 받기 싫은 생도에게 스스로 나갈 기회마저 주지 않는다면, 결국 탈영을 하게 됩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그 후 인간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스스로 세운 기준에 따라 살기로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동기 역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떠난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판단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에 만족하며, 여전히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없는 삶의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지옥의 문은 안쪽으로 잠겨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서 고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리 바꿈의 개념은 죄와 구원 모두의 핵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반면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를 주장하고 하나님께만 합당한 곳에 자신을 둡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고 인간에게만 합당한 곳에 자신을 두십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특권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속한 형벌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담의 결정이 왜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치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담이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선택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에 만족하고 하나님 없이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과 함께 살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앞에는 여전히 선악과는 놓여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선택이 나와 무슨 관계냐고 묻지만, 우리는 매일 아담처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을 지 모릅니다.


윌리엄 홀맨 헌트라는 화가의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이 어떤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문 주변에 넝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등불을 들고 이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문에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이 문은 안에서만 열릴 수 있는 문입니다. 스스로 자기 집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진리를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_ 로마서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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