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봄에 일어난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다루고 있는 <체르노빌>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원전 폭발로 인한 피해는 너무나 컸고, 방사능 유출로 인해 체르노빌 일대는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다. 결국 사람들을 대피시켜야만 했다. 그런데 한 노인이 한사코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답답하고 불쌍해 보였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가인 박경리 씨의 <토지>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소설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주인공 서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다. 어릴 적 서희는 할머니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서희야, 니가 가진 것은 땅이 아니야. 땅속에 숨쉬고 있는 생명이야." 서희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이 말에 담긴 뜻을, 땅은 단순한 소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체르노빌>에 등장하는 노인은 왜 땅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땅이란 단순히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자 삶 자체였기 때문은 아닐까. 자유 없는 삶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땅을 떠난 삶은 그에게 어떤 가치도 없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평생 가슴 속에 담아둘만한 사랑 하나 없는, 목숨걸고 지킬만한 믿음 하나 없는, 모든 역경을 잊게 만드는 소망 하나 없는 인생이 더 불쌍하고 답답한 것은 아닐까.
<토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서희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없구나. 이 땅에 해방이 왔는데, 그리운 얼굴들은 모두 땅을 두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지만 땅이 있는 한 돌아올 것이다. 땅이 있는 한, 땅 속에 생명이 있는 한…" 가슴 속 깊이 심겨진 무엇인가를 지키며 살아가는 답답한 인생이 되고픈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