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어느 자매가 다른 교회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주보에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 교회의 경우에는 예배시간에 별도의 헌금순서도 없고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기록하고 있지 않기에 그랬던 것 같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왜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기록하는지 설명해 주었지만, 납득할 수 없다는 눈치이긴 했다. 자기 눈에는 교회가 돈만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의 시선으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보에 나온 헌금자 명단처럼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거나 납득하기 어렵게 다가오는 것들이 많을 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그들이 복음을 접하는데 선입견을 갖게 하거나 방해하고 거부감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속화라고 하면 교회가 세상과 동화되는 현상을 떠올린다. 하지만 세속화란 사회학적 용어로, 종교가 공적인 영역에서 밀려서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되는 것을 의미한다. 막스 베버는 "사회에서 합리화, 산업화, 관료화의 삼중적 과정이 진행될수록 초자연적, 마법적, 초월적인 것이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결국 세속화가 진행될수록 기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밀려나 사적인 장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탈세속화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공공신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는 것도 공적인 영역에서 밀려난 기독교가 어떻게 다시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주보에 나오는 글귀나 설교 때 사용하는 언어와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돌아보며 어떻게 하면 세상과 더 잘 소통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