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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길벗 소로우 Apr 07. 2022

공인된 오류

변곡점이라는 단어처럼, 잘못 쓰고 있지만 아무런 헷갈림도 일으키지 않는 말도 드물 것이다. 어떤 사태나 상황의 추이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인다.

사실 변곡점은 그래프에서 곡률이 바뀌는 지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맨 아래, 맨 위가 아니다. 그 꼭짓점들은 최저점, 최고점이라고 불린다. 변곡점은 최고점과 최저점 중간쯤에 그래프의 곡률 변경이 시작되는 점이다. 그래서 그래프상 얼른 눈에는 잘 안 들어온다. 시사평론에서 이번 주가 변곡점이 될 것이다, 변곡점 돌파가 중요하다 등등 쓰고 있는데, 실상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차라리, ‘정점이 될 것이다’, ‘이번 주가 최고 고비이다’ 등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수학 선생님은 이 차이를 명확히 아시는데, 국민들 대부분이 쓰고 있으니 지금은 거의 공인된 오류가 되었다.


이런 공인된 오류는 많다. 역할을 ‘역활’이라고 발음한다. 담임선생이라고 쓰고 ‘다님’ 선생이라고 읽는다. 환영 플랭카드도 그러한 경우다. (현수막, 플래카드가 맞는 표현)

이런 제멋대로 표준화 현상 중에 하나가 최근에 윤석열 읽기이다.

현재 매스컴에서 윤석열이라는 이름을 발음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다.

- 첫째, 윤성녈 (Seong-Nyeol)

- 둘째, 윤성열 (Seong-Yeol)

- 셋째, 윤서결 (Seo-Gyeol)

‘열’ 자가 한자로 ‘렬’ 자라면 자음동화 현상이 발생해서 성녈이라고 발음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의 ‘열’자는 ‘기쁠 열’자이다. ‘렬’이 아니다. 이럴 때에는 자음동화는 없고, 국립국어원이 표준화한 ‘연음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연음법칙은 글자 그대로 발음하는 것이다.

이의 예로는,

- 독립투사 박열 (방녈이 아니고 바결)

-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김년아 아니고 기며나)

- 영어 잘하는 개그맨 김영철 (김녕철이 아니고 기명철)이 있다.

모두가 연음법칙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에 대해 가장 많이 발음되는 방식은 1번, 성녈이다. 제일 적게 쓰이는 발음이 3번, 서결이다. 방송사마다, 앵커와 기자마다 발음은 제 각각이다.


이 논란은 수년 전부터 있었는데, 나는 여러 홈페이지를 보면서 좀 놀라게 되었다. 3~4년 전, 해당자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높지 않았을 땐, 국립국어원은 ‘서결’로 읽어야 한다고 정확한 지침을 주었었다. 그 이후, 발음 방법에 재논란이 일었고, 기자들이 본인에게 어떤 발음이 맞냐고 묻자, 본인은 ‘우리 가족들은 ‘성녈’이라는 발음을 좋아했고, 다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성녈’로 불러달라’고 했다. 이상한 것은 재작년부터 국립국어원에 동일한 질의를 검색하면, ‘서결로 발음하는 것이 합리적이긴 하나 인명의 발음은 정해져 있진 않다:’는 아리송한 설명이 나온다.


이 현상은 흥미 있고 우려되는 현상이다.

법과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의 이름을 발음할 , 어떤 법칙 (두음법칙, 연음법칙) 손상되는 것이다.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모든 국어 법칙은 어떤 이에게 늘 평등한가? 왜 어떤 국어 법칙은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선택이나 가족의 선호에 밀리느냐 하는 것이다. 이건 우리말을 배우는 아이들에게도 이상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기며나(운동선수), 기명철(연예인), 바결(독립투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우리나라 말글 법칙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예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가 해방 이후 바로 표준교과서를 출판하고, 전국 단위로 보통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글 맞춤법 및 발음이 이미 표준화되어 있었고, 이를 정립한 조선어사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말모이를 보면, 조선어 학회 주도로, 베개(Pillow)를 베개냐, 비게냐 어떤 것이 옳으냐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토론 끝에 표준은 베개로 정하되, 비게도 사투리로 병용 가능하다고 정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게 조상님들은 수만 개의 단어의 표기와 발음을 후손들을 위해 검수했다. 이걸 표준화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불공평한 세상에 살게 된다고 본 것이다. 같은 학생이라도 수도권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되고, 충청 이남과 강원 지방 아이들은 문해력도 떨어지고, 답지에 답을 써도 종종 오답이 되고 마는 세상이 되는 것을 우려하셨다. (경기고에 진학한 마산중학교 출신 학생의 답은 가끔 오답처리될 수 있음. 예전에 장학퀴즈 과학 문제에서 정답이 고구마였는데 지방 출신 학생이 고메라고 답했음. 그때 사투리 등, 국어 전문성이 높은 차인태 아나운서가 결국 정답으로 인정해 주심)


조상님들은 해방 훨씬 전, 우리나라가 불평등한 세계로 발전해서는 안 된다 여기시고 1920~30년대에 꾸준히 한글의 표기법과 맞춤법을 정립해 오셨다. 이를 주도한 조선어학회는 일제에 추적을 받고 33명이 투옥된 후, 일부는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셨다. 그 이후 한글 말글살이를 위해 많은 분들 특히 일선 초, 중, 고등학교에서 수많은 국어 선생님들이 노력해 오셨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내가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서 서양의 그 어떤 물질문명의 결과물도 우리의 한글에 비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나라에 만리장성과 같은 장대한 토목이 없고, 돔 형태의 거대한 사원이 없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라 하셨다. 저들의 임금은 백성을 동원하고 고혈을 뽑아서 저 높은 건축물들을 쌓았지만, 우리의 세종대왕은 ‘지방관리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적어서 내게 고해라. 농사나 옷을 짓는 법 등 좋은 것을 찾으면 나도 알려 줄 테니 너희도 서로 알려 주어라’라고 하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갈수록 세종대왕에 대한 고마움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소중한 한글과 그 사용 법칙이, 법과 원칙을 옹호하는 집단 앞에서 맘대로 굴절되고, 소위 언론인이라는 분들도 당사자의 발음 선택권을 존중하겠다고 하며, 이젠 아예 국립국어원도 ‘이름의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고 연음법칙은 좀 더 합리적’(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라고 새 해석을 내놓으니 나는 불편한 맘이다. 박봉에 각종 국어 법칙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오신 국어 선생님들에게 송구한 맘이다.

누군가 이화여대를 리화 여대라고 지속 발음함으로 두음법칙을 무시했다면, 사상 정체성 논란까지 일어났을 이 나라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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