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길벗 소로우 Apr 08. 2022

고통의 인식

인식력이 높은 동물일수록 고통을 많이 느낀다. 고등 동물일수록, 저등 곤충보다 고통이 크다. 곤충 중에는 교미 중에 살해를 당하면서도 교미를 하는 종들이 있다. 또 몸이 거의 손상되었어도 방금 사냥한 먹이를 계속 먹는 곤충들이 있다. 이때 이들에게 분명 고통은 있지만, 교미의 욕망이나 탐식의 욕망을 이길 정도의 고통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새끼 발가락이 문지방에만 살짝 찍혀도 비명을 지르고 모든 다른 행동을 중단한다. 그때 입 안에 빵을 씹거나, 커피맛을 그대로 음미할 사람이 있을까?)


모든 생물 중에 인간의 고통이 가장  것은 과거, 미래  시간을 인식하는 능력 때문이다. 동물은 현존을 온전히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천변을 걷다가 가리 가만히 서서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리 현실에 완전히 침잠해 있되, 먹잇감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밖에 오리나 비둘기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현실에 몰입되어 있고,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없다. 그렇게 찰나에 집중할  있다면 동물이야말로 인간보다 영원에  가깝고, 영원을 이미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찰나는 영원을 메뷔우스의 띠처럼 살짝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이 큰 것은 동물이 가지지 못한 욕망, 의지 등 정신적 인지 능력이 큰 때문이다. 동물 중에 과거에 받은 학대와 손실을 생각하며, 분해 하면서 지금껏 우는 동물은 얼마나 될까? (물론 일부 고등 동물은 트라우마를 기억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만큼이랴?)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고, 보지도 못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동물은 얼마나 될까?


고등생물일수록 고통을 더 느낀다는 것은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거나 동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물들도 자식의 고통에는 슬퍼하고 고통을 동조하지만, 타개체의 고통에는 별로 동조를 안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우크라이나의 아이와 여인들의 고통에 대해 동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없는 인식능력을 가진 신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싶다. 그는 세상 모든 고통을 다 보고 들을 수 있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 고통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다.


만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가 신일 것이다. 성경에 ‘너희는 신이라’라고 표현하는 것이 있다. 인간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 신일리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한 부분에 신의 성품이 녹아들어가 있다. 그래서 다른 동물에게는 거의 없는 ‘타자에 대한 고통 공감’이 발현되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한 신의 아들, 선각자, 애국자 등의 고결한 고통에 대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눈물을 흘리며 그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대신 느끼고, 때때로 신의 고통도 상상해 본다. 그래서 인간이 근본 쓰레기임에도 불구하고, 고등 존재이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순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