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주의자가 고기를 먹고 식도락의 쾌락을 누리는 데에는 다른 생명체의 죽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이뤄지는 타살 말이다. 이 경우 내가 누리는 쾌락은 너가 당한 고통과 너의 억울한 죽음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인간 세계에 일어나는 소속과 소외도 같은 문제이다. 몇몇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소속되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겐 소외이기도 하다. 소속이 없다면 소외가 있을 수 없다.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됨으로 서로만을 향한 소속을 만들어 낸다면,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소외되어 있다. 소속과 소외는 같은 것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아프리카의 어느 엄청나게 드넓은 벌판에서 개개인별로 흩어져서 산다고 치자, 그때 우리는 그 어떤 사회나 부족 집단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는 그 누구도 소속 집단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은 상태이다. 소속과 소외는 도시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비도시에서는 소속이라고 보기에는 개체들 수가 너무도 적고, 그들의 밀집도는 낮다. 그러나 소외라고 보기에는 어느 정도 타자를 인지하고 있고, 모두가 비슷한 구심력을 가진 비슷한 수준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소외도 아니다.
육식을 하는 데서 얻는 쾌락의 총량과 억울하게 살해된 동물이 겪은 고통의 총량은 동일하다. 우리가 만든 소속이 산출해 내는 기쁨과 안락 등 감정의 총량은, 테두리 밖에 머물러야 하는 소외로 인해 발생하는 슬픔, 고독, 불안 등 감정의 총량과 동일하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나와 너, 안과 밖 등을 구분하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건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올해 과장 말년차가 되면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과 고통은, 내년에 내가 차장 1년차 승진자 명단에서 배제(소외)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안과 고통은, 그가 4년 전에 과장 1년차로 승진하고 간부급에 소속되면서 누린 기쁨과 안락에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