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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길벗 소로우 Dec 15. 2019

이 모든 이

퇴직을 한 직장인에게



우리는 늘 무엇이 되기를 소망한다. 

타고난 자기가 있고, 도달해야 할 자기가 있다. 우리는 그 둘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애쓴다. 


수십년 전, 나는 대단한 무엇이 되겠다 생각하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회사에서만 쭉 일했다. 지금 보면 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되진 못했다. 번잡하고 분절된 노동현장에서 직무도, 삶도 쪼개졌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20대 중반, 나는 회사 지하에서 서류를 정리했다. 색인표를 들고 입사서류를 분류했다. 나는 지하에 도서관장이었다.

나는 신생 휴대폰 업체의 고용 브랜드 외판원이었다. 후보자에게 회사소개 편지를 쓸 때는 카피라이터였다.

사내 규정을 만들 때는 정책관이었고, 때로는 협력사 갑질을 추적하는 형사였다.  

분노한 누군가 앞에서 회사를 옹호하는 변론가였고, 억울한 직원을 편들다가 혼자 점심을 먹는 변호인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잡초를 뽑던 정원사였다. 사내 도로에 떨어진 아기새를 구하는 생태론자였고, 불난 사무실에 남겨진 임산부 직원을 구하는 소방대장이었다. 어느 겨울엔 출근로에 눈을 치우는 청소부였다. 경쟁사 전임 창업자를 채용해 오겠다고 덤벼든, 겁없는 채용 몽상가이기도 했다.

주먹으로 분을 풀고자 하는 피해자 앞에서는, 회사를 대신해 안경을 벗고 어금니 꽉 깨물고 서 있었던 섀도우 복서였다. 

나는 24년간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지만 끝내 대단한 인물은 못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 모든 이로 있었다. 작지만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이.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가 만든, 돌의자를 보고 가슴이 먹먹했던 적이 있다.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것이고, 곡선은 하나님의 것이라 했다. 그는 곡선의 용을 표현하기 위해 작은 유리 타일들을 색깔별로 하나하나 다듬어 이어 붙였다. 그리고 오랜 작업 끝에 용 형상을 한 긴 돌의자를 만들었다.

제작과정이 지루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위용의 고딕양식 기둥보다, 내게는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신의 영역인 곡선을 사랑했고, 타일 모자이크를 선택했다.


지난 주, 나는 24년 간 근무했던 회사를 떠났다. 좋은 고용주를 만나 지금까지 많은 행운을 누렸다. 내게 멋진 기회들을 주신 회사와 선,후배님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이제 타일들을 좀 더 찾을 시간이다. 아마 내가 이미 아는 타일일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타일일 수도 있다. 언젠가 그 타일들이 다 연결되면 모자이크가 완성될 것이다. 


세월이 지나, 갖가지 색깔과 모양의, 그 소박한 타일모둠을 누군가 어루만지며,

'그는 곡선을 참 사랑했었구나...' 나지막이 속삭여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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