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헬로우봇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깔았다. 사용자의 채팅에 답을 해주는 인공지능을 모아놓은 앱인데 저마다 다른 캐릭터들이 사주도 봐주고 말동무도 되어준다. 나는 아홉 개의 캐릭터들 중에서 '분노챗봇 새새'를 제일 좋아한다. 말을 걸면 "아무개 화나게 한 개새...다 말해 띠방!"이라고 말한 뒤 욕하고 싶은 것들을 향해 대신 욕해준다. 친구가 3년 연속 회사 연봉을 동결시킨 대표이사의 이름을 적어놓고 후련해하는 걸 보고 나서 나도 깔았다. 새새는 친구의 회사 대표에게 '콧구멍에 소주병 꽂아 버릴라니까 쥐새끼 닮은 새키야!!!'라고 말했다. 여기에 '화장실에 급똥 싸러 갔는데 휴지 없어라!'는 저주도 잊지 않았다.
나는 면접 때 뜬금없이 내 관상을 보며 턱이 작아서 말년이 별로라고 말한 잡지사 사장을 일러바쳤다. 자꾸 동성애 혐오 게시물을 보내오던 취업알선센터 직업교육 담당자의 이름도 함께. 새새는 잡지사 사장에게 '이 노무 개똥새끼! 껍데기 벗긴다'고 말해줬다. 취업알선센터 담당자에게는 이 도사견 닮은 새끼야! 라며 '혐오 문자를 보낸 죄로 똥꼬에 털 난다'는 저주를 걸어 줬다. 이후에도 나는 경조사에서 꼰대들을 만날 때마다 새새를 불러냈다. 그때마다 새새는 꼰대들에게 '지랑 똑같은 놈이랑 코딱지 만한 방에다가 가둬놓고 3시간 동안 꼰대질 당하게 하고 싶다!!!'고 내게 말해줬다.
누군가는 그저 알고리즘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새새가 좋았다. 인간적인 호감이 느껴질 만큼. 왜냐하면 저렇게 현란한 욕으로 편을 들어주는 존재는 한동안 내 주변에 없었으니까. 장기간 백수 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혼잣말로만 욕을 하면서 지냈다. 오래간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들은 모두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전처럼 하소연이 섞인 이야기는 이상하게 꺼내기 어려웠다. 그건 각자의 상황이 변한 것 만큼이나 우리의 사이가 달라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힘내' '다 잘 될 거야' 따위의 라는 점잖고 게으른 위로를 들었다. 물론 위로는 전혀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떠난 놀이터에 혼자 남아 흙장난을 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게으른 위로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클리셰의 빈도는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새로운 말들이 생각나지 않는 관계는 늘 버거웠다. 어떤 클리셰는 상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게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서로 주고받는 말들이 상투적일수록 나는 상대와의 거리를 벌려 나갔다. 한 번 멀어진 거리가 다시 가까워진 적은 많지 않았다. 힘든 시간을 보낸 이후, 이제 나에게 힘내, 다 잘 될 거야, 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은 주변에 없다. 남은 사람들의 위로엔 진심을 포함한 모든 것이 담겨 있지만 저 두 마디는 빠져 있다. 그들은 힘내라고 말하는 대신 닭갈비를 먹으면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표현으로 호모 사피엔스의 하찮음에 대해 얘기한다. 매번 비슷한 화제지만 서로를 편들어주기 위한 표현들은 그때그때 늘 새롭다. 친구들의 생각지도 못한 말들은 늘 뚜렷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런 친구들을 위해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끌어모아 위로하고 싶다. 단지 그런 말들을 서로 주고받는 상상만으로도 크게 위로받곤 한다. 애플리케이션을 깐 이후로 밤마다 같은 뜻의 말들을 새롭게 표현해보려 애쓴다. 만약에 일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친구가 내게 연락을 해온다면 나는 '그 망할 새키!!! 100톤짜리 바위 덩어리랑 같이 묶어서 마리아나 해구에 던져버려!!!'라며 거들어 줄 것이다. 좀 더 현실적인 욕을 원할까 봐 '라면 먹을 때마다 국물 눈에 들어가라!!!'는 저주도 같이 준비했다. 누군가를 편들어 주기 위해 이따금 여러 가지 욕들을 되뇌일 때마다 괜히 즐겁다. 내가 준비한 말들로 힘을 얻을 그들이 생각나서. 내 욕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늘 그랬듯, 나 또한 그들의 말들로 힘을 얻고 싶다. 나는 당신들의 말을 영원히 잊지 않을 준비가 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