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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Jan 12. 2019

PM 01:11

애인에게 아는 사람의 사주를 봐달라는 연락이 왔다. 장난 반 취미 반 삼아 가끔 봐주던 게, 이야기가 퍼졌는지 여기저기서 부탁이 들어온다. 물론 자주 해주진 않는다. 직업적으로 사주를 봐주는 사람들처럼 빠르게 운세를 파악할 능력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대충 뭉뚱그려 얘기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적잖은 시간과 품이 든다. 더불어 남의 인생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반년 뒤에는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내년에 재물 운도 있네. 만약 아니면? 실제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와서 머쓱할 때가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구구절절해가며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봐 달라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명리학 책을 폈다.     


의뢰인은 애인과 같은 회사에 다니는 대리님. 단기 프로젝트로 협업관계가 된 다른 부서에선 자꾸 협조를 안 해주고, 자신의 직속 부하 직원은 자꾸 말을 안 들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고 했다. 결국 이직 운이 있는지 좀 알아봐 달라는 얘기였다. 나는 책을 보면서 음양오행의 합을 맞춰보고 십이운성과 육신의 조화를 하나하나 다 계산해가며 그의 이직운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의 사주에서 볼 수 있었던 건, 그가 굉장히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가정에선 좋은 아버지, 직장에선 자상한 리더가 되려는, 그러니까 역할에 충실한 사람. 그를 만나기 전에 애인에게 성격이 이러하냐고 물으니 그건 맞단다. 실제로 만난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보통 신촌이나 홍대에서 사주를 보려면 2만 원 정도를 복채로 줘야 하는데, 대리님은 태국 식당에 가서 그보다 배는 더 비싼 밥을 사줬다. 그럼에도 나는 있는 그대로 말해야 했다. 비싼 밥을 먹었다고 없는 이직운을 있다 말할 순 없었다. 그걸 걱정하는 와중에도 밥이 너무 맛있어 눈치 없이 그릇을 다 비웠다.    

 

2차로는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그건 나와 애인이 내기로 했다. 나는 막 나온 맥주를 마시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이직운은 없어요." 대리님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대신 나는 이직운이 없어도 사주 곳곳에 불이 깔려 있어서 돈 버는 걸 걱정할 운은 아닌 것 같다 말해줬다. 그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내가 본 게 정확하다면, 정말 그랬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굉장한 의미를 두는 분이세요." 그가 손뼉을 쳤다. "맞아!" 그는 그걸 다른 이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대리님이 너무 착해서 그래요." 애인 역시 그게 문제라며 거들었다. 이야기는 타 부서의 몽니와 부하 직원의 태업 문제로 이어졌다. 나는 카프카의 벌레 이야기를 해 드렸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던 주인공이 벌레로 변했을 때, 가정과 회사의 반응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아끼던 인간이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사실보다 각자가 기대고 의지하던 누군가의 역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까워했다. "어쩌면 대리님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할이 사라진 인간이 어떻게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존재와 역할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긴 한가?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드릴 얘기가 없었다. 그저 앞으로는 더 참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이야기를 얼버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주말을 맞아 방 청소를 하다 책상 서랍에서 더 이상 듣지 않는 CD 모음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때 용돈을 모아 샀던 록 앨범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델리스파이스의 <D> 앨범을 보니 음원으로 음악을 들은지 한 참이 됐는데도 괜히 반가웠다. 수록곡인 <안녕 비밀의 계곡>을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토요일 하굣길 음반가게에서 이 앨범을 사자마자 CD플레이어를 틀었다. 버스의 엔진소리가 음악에 섞이는 게 싫어 집까지 한 시간 쯤 되는 거리를 무작정 걸어갔다. 파란 하늘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화단에 간신히 피어있는 개나리들이 보였다. 노래는 말했다. "아지랑이처럼 아련했던 교정이여 안녕, 정든 친구들 선생님 모두 안녕"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고 어디를 가려는 걸까. 나도 마냥 떠나고 싶었다. 학교는 쓸데없는 규율로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좁은 교실에 수십 명이 부대끼며 11시간을 갇혀 보내야 하는 나날이 지겨웠다. 하교 후 무작정 걷고 싶을 땐 이 노래를 들으며 가보지 않은 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왔다.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안녕을 고한 뒤 낯선 길을 걸어야만 내일을 다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 걸으면서 들었던 음반들이 이제는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돼버렸다. 그래도 버릴 생각은 없다. 그건 일종의 의리 같은 것이기도 하고 나의 역사이기도 하다. 굳이 역할이 확실한 것들만 내 방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나 역시 영원히 쓸모 있는 존재로서 지낼 순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맡은 역할들은 언젠가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때 남은 것은 오직 우리의 존재뿐이다. 그때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기를. 내 역할 너머에 있는 존재를 봐줄 이들을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의 존재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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