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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Jan 12. 2019

PM 8:42

대학 시절 1년 반 동안 야학에서 어르신들을 가르쳤다. 큰 뜻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봉사시간이 필요해서.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야학의 행정적 성격이 비정규 비인가 교육시설로 봉사시간을 인정받을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걸 알고도 이곳이 좋아 1년 남짓을 더 활동했다. 첫 수업은 오전 4시로 막 학교가 끝난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친다. 수업이 막바지인 오후5시 반 쯤이 되면, 할머니들이 한 분 두분 오시기 시작한다.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야학의 시작이다. 지금은 수업 체계가 달라져 있겠지만, 그때는 한글반 할머니들의 수업시간은 오후 6시, 초등-중등 검정고시반은 오후7시부터 10시까지였다. 나는 전공에 맞춰 일주일에 두 번 중등 사회 과목을 담당했다. 할머니들께서 오실 때마다 자주 먹을 거리를 싸 들고 오시는 통에 수업이 있는 날에는 따로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됐다. 보통은 빵이나 과일을 챙겨 오셨는데, 어떤 날에는 김장을 했다며 겉절이와 남은 수육을 바리바리 싸 오신 적도 있었다. 그걸 바라고 이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취생인 내게 그렇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처음 수업을 참관했을 때, 할머니들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에 대해 배우고 계셨다. 교재에는 '원주민들의 값싼 노동력에 외국의 자본이 결합된 농업 형태'라고 적혀 있었다. 진도를 더 나가도 될 것 같았지만 선생님은 수업의 절반 정도를 플랜테이션을 이해시키는 데 할애했다. 프랑스나 영국이 동남아에서 나는 바나나나 후추를 싸게 유럽에 들여와 팔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라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때 갑자기 뜬금없이 "거, 한미 FTA는 뭐여? 그거랑 비슷한 건가?" 라는 질문이 들어왔다. 한 분이 신문에서 본 것들을 물어보면서 분위기가 일시에 산만해졌다. 플렌테이션 하나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할머니들은 벅차 보였다. 수업 시간을 5분 쯤 남기고 나서야 할머니들은 가보지도 못한 필리핀 바나나 농장에 대한 지식을 간신히 머리에 담을 수 있었다. "원주민의 노동력에 선진국의 자본이 들어간 농장이 뭐라고요?" "플랜테이션!" 이번엔 모두가 대답할 수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묘한 시간차를 두고 따라 이야기했지만, 선생님도 학생도 거기까지 신경쓸 여력은 없어 보였다. 선생님은 "복습 꼭 해오셔야 해요!" 라고 말하기를 잊지 않았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 내게 재차 당부했다. 수업 진도가 늦는다고 할머니들을 절대 다그치지 말 것. 설사 답답해도 절대 표정으로 드러내지 말 것. 선생님은 할머니들이 연세가 드셔서 학습능력이 더디며 모두가 새벽에 나가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는 사실을 내게 알려줬다. 한 분은 작은 백반집을 하고 계셨고, 나머지 세 분은 하우스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다. 새로 들어왔다는 50대 어머니 한 분은 용달차를 몰며 과일 장사를 하고 계시다 했다. 그분들이 이곳에 와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적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로도 할머니들이 플렌테이션을 잊지 않게 하는 데는 2주의 시간이 더 걸렸다. 1주일에 두 번 하는 수업인데 그정도면 꽤 빠른 거라고 교장 선생님이 알려줬다. 예전 선생님이 알려준 것들을 학생들이 모두 잊어버렸다는 건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렇게 진도가 나가다가는 시험이 열리는 4월까지 합격 점수를 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러던 차에 야학에서 여는 일일주점이 열렸다. 교육청에서 주는 보조금만으로는 운영이 어려워 해마다 야학 살림에 보태 쓰기 위해 여는 행사였다. 야학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여기저기서 지인들을 불러오는 통에 꽤 넓은 호프집이 꽉 찼다. 이럴 때 건배사가 빠질 수 없겠지. 야학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한글반 할머니께서 제일 먼저 건배사를 했다. 10년이 흘러 모든 이야기를 또렷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말 하나는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 사람 만들어준다고 애써서 다들 고마워유." 왜 이 말을 기억하냐면, 괜히 코끝이 찡해서 건배사가 다 끝나도록 테이블 밑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 표지판을 읽거나 자신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쓰는 일에도 인간의 존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기억하고 까먹기를 챗바퀴처럼 반복하면서도 이곳에 나오시는 할머니들이 원하는 건 졸업장 이전에 인간다운 삶이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생존을 넘어 존엄한 삶을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 에너지를 결실로 만들어내기 위해선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다만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건 스스로를 존엄하게 만들고자 하는 그 끊임없는 시도라고 나는 믿는다. 하물며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들처럼 포기하지 않고 시험에 도전하는 그분들의 삶이란. 안타깝게도 내가 맡은 반의 다섯 분은 모두 검정고시에 합격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시험을 포기한 분들은 없었다. 그동안 만난 어르신들 모두가 사람되기 위해 공부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아는 한 그분들 만큼 인간답게 사는 분들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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