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로 Jan 12. 2019

AM 03:50

남녀를 통틀어 전역한 이라면 잘 알겠지만, 군생활 2년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쯤 되겠다. 굳이 따지면 모든 게 금지된 건 아니니 '선임과 간부에게 허락을 받는다면'이란 전제를 붙이는 게 적당하리라. 정리하자면 선임과 간부가 허락하지 않은 모든 일들은 군생활 동안 금지되는 셈이다. 문제는 이들이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 남겨지는 일이다. 만약 당신이 몇 시간 동안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 혼자 있다면? 아마 그 날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단 5분 대기조가 출동해 부대 주변을 뒤지기 시작할 테고, 곧이어 전 중대원이 침상 밑까지 들춰가며 당신의 이름을 불러재낄 것이다. 당연히 당신이 그리워서는 결코 아니다.


군대에선 장시간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 나와선 안 된다. 이는 최악의 경우 탈영이나 자살을 의미한다. 모든 부대에서는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서로의 소재를 수시로 파악한다. 모든 일과가 인원 파악으로 시작해 인원 보고로 마무리된다. 자는 시간에도 불침번들이 30분 간격으로 얼굴에 랜턴을 비추며 머릿수를 확인한다. 급히 심부름을 가야 할 때는 2인 1조로 가는 게 원칙이다. 화장실을 갈 때도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니 전역해 위병소를 나서지 않는 이상, 이곳에 나 혼자서 숨 돌릴 기회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누가 내게 군생활을 통틀어 제일 괴로웠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하기 곤란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모든 과정이 고통이었으니까. 눈을 뜨면 머릿속엔 그저 몇 시간만이라도 혼자 있었으면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복무기간이 줄었으면, 친구들과 술 좀 마시게 열흘 치 휴가증이 나왔으면, 하고 바란 게 아니었다. 단 몇 시간이라도 혼자 있을 시간을 준다면 열심히 청소도 하고, 두 사람 몫으로 삽질도 하리라 다짐하며 매일을 버텼다. 하지만 그 소박한 바람에도 온 우주의 기운은 나를 돕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점호마다 나타났다 훌쩍 사라지는 취사장 고양이만큼도 못한 게 군 시절 내게 주어진 삶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은 살아가고 자원은 길러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나는 국가의 자원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보내는 삶이란 결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병 계급장을 달고 국토방위를 위한 자원으로 길러지고 있을 즈음, 우리 대대가 휴전선 경계 작전에 새로 투입됐다. 흔히 말하는 GOP 철책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일이다. 이곳에선 실탄 75발과 수류탄 한 발을 든 채 초소에 들어가 하루 종일 주위를 살펴보는 일을 1년 내내 반복한다. 투입된 지 사나흘쯤 지난 때였다. 철책을 점검하며 내려가다 문득 참호 뒤편에 무너진 초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초소가 무너진 건지, 무너뜨린 건지, 그 이유는 뭔지 소대장에게 물었다. 그는 예전에 근무를 맡은 부대에서 상병 한 명이 저곳에서 수류탄을 물고 자살했는데, 사람이 죽은 초소니 보수하지 않은 채 그냥 무너뜨린 것 같다고 얘기했다. 잠시 용변을 보고 오겠다며 후임을 따돌린 뒤에 빈 초소에 혼자 들어가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군대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있기 위해선 누군가를 따돌려야 한다는 걸, 특히나 도망칠 곳 없는 휴전선 철책에서 기어코 그런 일을 한다는 건 곧 자살을 결심할 때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죽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다만 24시간 서로가 서로를 남김없이 바라볼 수 있는 구조에 놓인 것만으로도 인간이 얼마나 고통받을 수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직 고독만이 치유할 수 있는 아픔이 있음을 이곳은 인정하지 않았다. 자살한 상병의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 점에서만큼은 그와 내가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자꾸 되물었다. 그에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시간과 자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홀로 앓다 툭툭 털고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자꾸 이상하게 눈 밑이 씰룩거렸다.


한밤중에 초소에 투입되면 근무를 선다는 핑계로 야시경을 자주 썼다. 희미한 빛까지 증폭시켜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장비다. 야시경을 쓴 채로 고개를 들면 온 우주의 별들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우주로 시선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그게 내가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밤하늘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 뜬금없이 생활관 서가 한 켠에 꽂혀있던 웬디 매스의 성장 소설 <우리 모두 별이야>가 떠올랐다. 그런가. 정말 우리 모두는 별인가. 24시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자리에서 부대끼며 자야만 하는 별들. 고독을 인정하지 않는 이곳의 규칙들. 그게 어떤 이들이 이 세상에서 너무 일찍 사라져 버린 이유였다. 모두 여기 오지 않았다면 사라질 이유가 없는 이들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PM 8:4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