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슨도 비둘기를 키우는데 (Feat. American Head Charge, Soilwork)
몇 년 전 일본의 TBS 방송에서 방영한 <어그레시브 레츠코>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이 있다. 주인공인 레츠코는 25살의 무역회사 경리부 여직원으로 화나는 일이 생기면 시내 구석에 있는 노래방에 찾아가 데스메탈을 부르며 스트레스를 푼다. 거의 매일. 그도 그럴게 상사인 황돈 부장은 툭하면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고, 사수인 츠보네는 퇴근 직전에 꼭 일을 한 뭉치씩 넘겨준다. 연애는 늘 실패하고, 엄마는 집에 올 때마다 결혼을 종용하고, 새로 온 신입은 밤마다 장문의 메시지로 레츠코를 괴롭힌다. 그 상황에서 레츠코는 그 누구와도 맞서 싸우지 않는다. 회사 사람들을 상대로 싸워봐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츠코는 길거리 인터뷰에서 황돈 부장을 욕한 게 발각돼 바로 단기 계약직 신분으로 전환된 적이 있다. 상대가 나를 괴롭혀도 마땅한 카드가 없는 위치. 우리는 흔히 그런 존재를 을이라 부른다.
스스로가 슈퍼 갑이 아닌 이상 살면서 을의 입장을 한번쯤은 겪을 수밖에 없다. 그건 직장인만이 아니라 자영업자도 마찬가지인데, 여차저차 일을 해결하고 난 뒤에는 무너진 자존감과 분노가 부산물처럼 마음 한편에 쌓이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두 달 동안 외상을 갚지 않은 손님 때문에 속을 썩였다. 맞은 편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남자들이 배달을 시켜 먹고 돈을 달아놓곤 했는데, 무려 7만 원이 넘는 금액이라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직접 찾아가서 사정을 말했더니 “아니, 우리가 먹고 튀려는 것도 아니고, 조만간 줄게요!” 라면서 역으로 화를 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한마디 할까 싶었으나 그냥 알겠다며 가게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그들도 손님이고, 손님을 이길 수 있는 사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나 같이 장사하는 입장에서 적을 만드는 건 결코 좋지 않다(물론 그들이 이 동네 소문난 건달들인 이유도 있다).
집에 오는 길, 속에서 천불이 났다. 마음을 다잡으며 좋게 생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내가 저 집에 갖다 날랐던 쟁반이 몇 개였던가. 뜨거운 우동을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씩 쟁반에 얹어 날랐던 게 생각나자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거대해졌다. 우라질 놈들. 가뜩이나 가게 사정도 안 좋은데. 낡아빠진 건물에 오르기만 하는 임대료. 낡아 가는데 치울 엄두는 나지 않는 창고 설비들. 코로나 사태 이후 어쩔 수 없이 버려야만 했던 남은 재료들. 그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만 같은 내 인생. 소설가 진형민의 단편 『그 뒤의 인터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럼 어른들은 도대체 왜 살아요? 사는 게 계속 억울하기만 하고 심장 쫄려 가면서 일만 하다 죽으려고 살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게다가 언젠가는 죽어야 하잖아. 근데 태어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니. 샹!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화가 쌓여 잠이 안 올 때에는 조용히 밖을 나설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내 취향 기준으로 제일 사악한 노래들만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문 밖을 나선다. 굳이 기쁜 날이 아니라도 메탈을 들으면서 하는 산책은 정서에 좋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치유 받아야 한다는 말 따위, 나는 믿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를 많이 만나는 직군의 사람들에게 최고의 치유는 사람이 아닌 것들과의 소통이다. 어제는 아메리칸 헤드 차지와 소일워크의 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파괴적인 전주가 시작되고 보컬이 울부짖으면 이 세계가 금방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다 멸망해라! 아니, 그건 좀 억울해. 그냥 너희들만 멸망해! 나를 존중하지 않았던 인간들이 정신없이 후려치는 드럼과 기타연주 속에서 서서히 흩어진다(정말로 누군가에게 후려쳐 맞아서 없어졌으면 좋겠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 묘한 부러움과 쾌감이 동시에 느껴지는데, 자신의 분노를 어딘가 내다 팔 수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 통쾌하게 느껴져서다. 분노로 가득한 얼굴로 돈가스를 서빙 한다거나, 철판요리를 만드는 건 존재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메탈의 세계에선 가능하다. 그들은 프로로서 관객들에게 정제된 분노를 판다. 데스메탈 밴드가 뮤직비디오 속에서 갑자기 생긋 웃는다면, 그건 그들의 직업윤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 활짝 웃는 걸 그룹으로부터 큰 위로를 얻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그들이 연출해내는 밝은 표정 이면에 있을 수많은 그늘들이 생각나서다. 아파도 슬퍼도 웃으면서 무대에 서야 하는 일이, 정말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머리 숙여 사과해야만 하는 일들이 분명 한 번쯤은 있었을 테니까.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서야 한다면 무대에서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욕이 섞인 가사를 쏟아내는 게 내게는 훨씬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프로패셔널한 분노 속에서 나는 자연스레 치유된다.
사실 어떤 경우 분노를 치유하는 건 또 다른 분노다. 그건 우리가 받는 대부분의 스트레스가 안 되는 걸 되는 걸로 만들라는 억지 요구 속에서 싹트기 때문이다. 돈 앞에서 우리는 그 요구를 어떤 경우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수익창출의 세계에서 부정적인 말과 표정들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다. 우울증이 생기든 내면이 썩어가든 일단은 타인 앞에서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스스로 강제해야만 사회적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긍정이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면, 슬프고 화가 나도 웃어야 하는 이유 역시 돈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미 넘치도록 긍정적인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요즘은 세상에 가득 들어차 있는 무조건적 긍정들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음원 차트와 서가 한편을 가득 채운 그 수많은 ‘괜찮아’라는 말들 말이다. 그것들은 때로 집단적 최면 같기도, 자기애를 빙자한 자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닌 건 아닌 거고, 끝내 해내지 못하는 것들이 인생에는 꼭 있기 마련이며,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서라도 끝내 화해할 수 없는 이들도 삶에는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감정의 끝이 기어이 ‘괜찮아’라는 말로 마무리될 필요는 없다. 짧은 인생, 경험해보니 스스로 괜찮다고 아무리 다독여봐야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더라. 개 같은 놈들은 여전히 이 세상 어딘가에서 개 같이 행동할 테고, 개 같은 기억들은 언제나 떠올려도 기분만 개 같을 뿐(글과는 별개로 언제나 사랑스러운 반려견들에게는 미안함을 전한다).
중요한 건 부정적인 감정들에 괜찮다는 말을 덧바르는 게 아니라 가슴속 밑바닥에 쌓인 분노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분노를 다스릴 수단이 필요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 도둑질을 하고 다니던 유년 시절 마이크 타이슨이 비둘기를 키우며 세상을 향한 증오를 달랜 것처럼(그는 쉰 살이 넘은 지금도 비둘기를 키우며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속 울분을 노련하게 해소하는 법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된다. 내가 마이크 타이슨이었다면 굳이 메탈을 들으며 화를 풀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그게 포인트다. 핵주먹을 가진 그조차도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뭔가를 한다. 그러니 우리도 뭔가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