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사실 말이 시작이지 내 피드를 올리는 일은 거의 없다. 보통은 타인의 피드를 염탐하다 ‘좋아요’를 누르는 걸 즐긴다. 친구들의 피드가 뜸할 때면 해시태그 검색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올린 사진들을 훑어본다. 당연히 #록페스티벌을 검색한 적도 있다. 그때마다 깜짝 놀라는데, 생각보다 글라스톤베리를 다녀온 사람들이 많아서다.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성지에 당도한 순례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알록달록하고 자유분방한 의상들로 무장한 채. 일산에서 신촌가는 광역버스에 앉아있는 것도 좀이 쑤시는 내게는 열세 시간 비행기를 타고 글라스톤베리에 찾아가는 그 열정은 경이롭기만 하다.
그에 비하면 밴드 음악을 좋아한다고 자처하는 사람치고는 해외 페스티벌에 간 경험이 거의 없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내향적 기질이 해외 페스티벌에 가고픈 욕구를 이제껏 억누른 결과다. 그건 순전히 여행에서 맞닥뜨리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여권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쩌지? 이 엉망인 영어 실력으로 숙소 예약은 어떻게 하고?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실제로 도쿄의 신주쿠 역 안에서 두 시간을 넘게 헤맨 적이 있다) 휴대폰부터 동전 한 닢까지 바구니에 탈탈 털어 넣고 무뚝뚝한 공항 직원들 앞을 지나가야 하는 것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공항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그 피곤한 과정은 어떤가.
그런 의미에서 2017년 일본의 치바 마린스타디움에서 열린 ‘섬머소닉 페스티벌’을 다녀온 건 나로서는 대단한 용기였다. 직접 가보니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심형 페스티벌답게 놀라운 것들뿐이었다. 간결한 동선, 전 세계 음식이 모두 모여 있는 푸드코트, 깔끔한 실내 시설 모두 흠잡을 게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 허전했다. 메탈 밴드를 한 팀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왕 온 거 전 세계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전 인류적 슬램을 기대했건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금요일 하루만 갔다 와서 그랬을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아쉬운 마음에 타임테이블을 들여다봤다. 역시나 다른 요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흐름이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록 페스티벌은 메탈밴드의 비중이 매우 적다. 특히나 전 세계 대중음악박람회를 표방하는 섬머소닉 페스티벌의 성향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메탈밴드를 단 한 팀도 보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었다. 팝과 일렉트로니카 위주인 이 페스티벌에도 메인 스테이지 라인업에 메탈리카나 슬립낫, 마릴린 맨슨이 이름을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흐름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다행히도 음악 시장 규모가 큰 북미나 유럽에선 여전히 메탈 페스티벌이 열린다. 그중에서도 영국에서 열리는 다운로드 페스티벌은 메탈계의 글라스톤베리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과장을 조금 보태 내가 학창 시절 들었던 모든 메탈 밴드들이 사흘간 이 무대에 전부 오른다. 영상 속 관객들은 열정이 넘치다 못해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다. 이미 그 자체로도 압도적인데 슬램존에서의 모습은 저 안에서 죽는 사람이 나오진 않을까 싶을 정도다. 메탈이 트렌드를 벗어난 음악이라 해서 페스티벌의 모습마저 폐장 직전의 동물원 같지는 않다는 얘기다. 여기에 다운로드 페스티벌을 실제로 다녀온 커뮤니티 회원들의 후기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깨끗한 화장실과 대형마트가 압권이란다. 나는 가보지도 않은 페스티벌을 상상하느라 잠시 넋을 놓는다. 만약 영국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다운로드 페스티벌에 가보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이번 생에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내게 다운로드 페스티벌은 동방의 샹그리아처럼 남아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환상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눈에 파묻힌 나가노의 술집. 레몬이 가득 열려있는 시칠리아의 해안가. 그리고 리스본의 노을처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이제는 언제 찾아갈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는 여행지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예전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여행을 갈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나는 여행이 늘 무서우니까. 사실 여행보다는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기행문을 읽는 걸 더 좋아한다. 실제로 여행을 다녀오지 않아도 다녀온 사람과 대화가 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까. 여름에는 모히또를, 겨울에는 장판을 곁에 둔 채 하는 간접경험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여러모로 괴로운 여행보다는 안락한 환경에서 즐기는 간접경험이 내게는 더 잘 맞는다.
당연하겠지만 끝내 찾아갈 수 없을지 모를 곳에 대한 환상을 대체재로 즐기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머나먼 섬들의 지도』 의 저자 유디트 샬란스키는 여행 자유화 조치가 내려지기 이전 동독에서 태어났다. 국경을 넘는 것과 탈출이 동의어로 간주되던 시절, 지도는 그녀가 외부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녀에게 지도는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환상을 해소해주는 완벽한 대체재였다. 실제로 찾아갈 필요가 없을 만큼. 그녀는 인터뷰에서 책의 부재 [간 적 없고, 앞으로도 가지 않을 50개의 섬들]처럼 앞으로도, 그 앞으로도 책 속의 섬들에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여행은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환상을 깨는 일이니까. 그리고 환상을 넘어서는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실 꽤 적지 않은 상처들이 환상을 기어이 현실로 끄집어내는 데서 찾아온다. 환상을 환상으로서 간직하는 것. 그 환상을 연료삼아 현실을 살아내는 것. 나도, 샬란스키도 그런 유형의 인간인 것이다. 누군가가 이를 두고 용기 내 떠나지 못한 자의 정신승리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반드시 현실로 가득차야만 하는가? 그런 삶을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 생각하는 쪽이다.
다운로드 페스티벌 2019. 저기 있으면 진심 뼈도 못추릴 것 같다.
시내에 나가는 것조차도 신경이 쓰이는 요즘. 이렇게 부자유한 몸이 된 거 무의식 속 깊이 묻어두었던 환상을 꺼내 잔뜩 펼쳐보기로 했다. 유튜브에 다운로드 페스티벌 2019 라이브 실황을 검색했다. 영국 현지 방송에서 방영한 라이브 실황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무삭제 버전도 보인다. 혼자서 보고 들으며 즐기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분량이다. 라이브 스트림으로 중계를 하는 최근의 추세 덕분이다. 준비물은 마트에서 산 비엔나소시지와 맥주 한 캔!
이제 방구석 록 페스티벌이 시작된다. 첫 번째 타자는 슬립낫! 비명소리로 만든 오프닝 뮤직이 나오더니 장막이 내려가고 보컬 코리 테일러가 괴성을 지르며 걸어 나온다. 첫 번째 곡은 <People=Shit!>. 음악이 절정으로 치닫자 턴테이블을 맡은 시드가 광분해 무대 위를 휘젓고 다닌다. 그 광기에 수만 명의 관객들이 일제히 들썩인다. 나는 검투사의 결투를 보고 있는 로마의 황제처럼 그들의 분노를 음미하며 장마를 앞둔 여름밤을 누린다. 이런 종류의 행복은 인생의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선 굳이 거대한 세계가 필요 없음을. 그 완벽한 세계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