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팀, 무능한 지휘관이 적보다 무섭다

by 일로

2008년 11월 27일(한국시간), 바르셀로나 FC와 스포르팅 리스본이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격돌했다. 선제골은 바르셀로나의 티에리 앙리가 터뜨렸다. 오른쪽에서 메시가 돌파해 넘겨준 컷백을 앙리가 중앙에서 마무리했다. 원톱 스트라이커로서 훌륭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프타임에 돌연 교체됐다. 이유가 뭐였을까? 훗날 앙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펩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3P라고 부르는 요소가 있습니다. 플레이, 점유(Ppossession), 그리고 포지션이죠. 아시겠지만 그중 제일 중요한 건 포지션이에요. 나에게 공이 오도록 하려면 팀원들을 신뢰하고 포지션을 지켜야 해요.”


앙리는 자신이 그 경기에서 포지션을 지키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당시 펩 감독은 피치를 15개 구역으로 나눠 각 포지션의 선수들이 이 밖을 벗어나지 않도록 교육했다. 오직 메시만이 자유롭게 구역을 오갈 수 있도록 했는데, 메시가 구역을 넘나들면 이를 커버하기 위해 앙리와 사무엘 에투는 정해진 구역으로 옮겨가야 했다. 말레이시아전 리뷰를 하는데 17년 전 챔피언스리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두 경기의 결정적 차이가 ‘프리롤’ 운영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펩 과르디올라가 내세운 프리롤 운영의 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프리롤을 맡은 선수의 빈자리를 커버할 것.

2. 주위 포지션의 선수들이 프리롤 선수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위치에 서 있을 것.

펩 과르디올라는 그라운드를 15개 구역으로 나누어 선수들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축구에 규율과 원칙이 필요한 이유


당연히 여기엔 약속된 움직임이 필요하다. 메시가 10번 자리로 옮겨가면, 앙리와 에투는 13, 14번 자리로 이동해 플레이한다. 반대로 메시가 측면으로 이동하면 둘 다 15번 자리로 침투한다. 그 뒤에서 부스케츠와 사비가 10번과 7번 자리에서 후방을 커버한다. 단순히 자유로운 역학을 부여받은 선수 하나만 여기저기 움직인다고 프리롤 플레이가 되는 게 아니다.


이번 말레이시아전에서 이강인과 손흥민이 프리롤을 부여받았다. 이강인이 우측과 중앙, 3선, 손흥민이 좌측과 중앙, 투톱의 한 축으로 움직였다. 이게 이번 경기의 가장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두 선수가 포지션을 파괴하고 여기저기 오가는 동안 주변 선수들과 약속된 커버 플레이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해 줘!’ 축구의 핵심은 그냥 이 선수를 방임 상태로 두는 게 아니다. 해당 선수가 최적의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서는 주변 선수들이 약속된 포지션에서 움직여야 한다. 자율성에 근거한 축구도 최소한의 규율을 지켰을 때 빛을 발한다. 이번 경기를 '해 줘 축구'로 부르기조차 낯간지러운 이유다. 이 경기에서 클린스만은 지휘관이 아니라 방관자였다. 감독과 선수 사이의 원칙 및 규율이 전무했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손흥민과 이강인이 모두 오른쪽에 몰려 있다. 좌측 공간이 크게 비어있고, 중앙 침투를 이재성이 하고 있는 상황. 언더래핑으로 파고든 설영우의 뒤편이 비어 있다
오른쪽에 있던 이강인이 왼쪽으로 이동했다. 손흥민이 가운데로 이동하면서 오른쪽이 비어있다. 이 와중에 중앙 침투 중인 이재성.


한국 축구? 자율 축구가 아닌 무정부 상태


사진에서 보듯 이강인이 정 반대편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손흥민이 오른쪽에 와 있는 모습도 보인다. 경기 내내 이 둘의 동선이 겹쳐 있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강인의 특기가 반대 전환인 걸 생각하면 손흥민이 우측에 자리를 잡는 건 비효율적이다. 더불어 중앙 미드필더들이 갈 길을 잃어버린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턴오버 시 왼 편의 공간이 빈다. 말레이시가에는 킥이 좋고 달리기가 빠른 선수가 많다. 반대전환 패스 한 방에 수비진이 붕괴될 수 있다.


측면 포워드들의 동선이 겹치고 쏠리면서 엉뚱한 인원들이 전방 침투를 시도한 것도 치명적이었다. 드리블러인 두 선수가 페널티 아크 지역에서 맴도는 동안 이재성이 중앙 침투를 시도했다. 이 그 와중에 조규성은 크로스가 날아오는 반대 방향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상 이재성이 중앙 스트라이커 역할을 해 준 셈이다. 이러면 턴오버 시 세컨드 볼을 소유하거나 재차 압박을 해 줄 자원 하나를 잃게 된다. 센터백들은 바로 상대팀의 역습에 노출된다. 실제로 이렇게 두 골을 내줬다.


투 프리롤 전략은 이렇게 공간의 쏠림 현상만을 야기하는 게 아니다. 위에서 서술했듯 프리롤이 작동하려면 나머지 선수들의 커버 플레이가 유기적이어야 한다. 대표팀에게는 이런 체계가 없었다. 그 탓에 황인범과 이재성이 두 선수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여기저기 끌려 다녔다. 터치라인부터 중앙, 하프스페이스에 이르기까지 장소도 중구난방이었다. 투 프리롤 전략이 팀 체계를 완전히 박살 냈다. 사인이 맞지 않아 두 줄 수비조차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역할을 맡은 선수가 둘이나 있으니 수비블록이 제대로 잡힐 리 만무했다(보통 프리롤에게는 수비 임무를 부여하지 않는다). 패스 한 두 개에 수비라인이 무너지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막판 실점 장면. 이강인의 수비가담이 늦었고 패스길이 열렸다. 왼쪽의 손흥민이 서 있고, 위치가 겹치는 황희찬이 수비를 하러 가운데로 뛰어오는 중.


무능한 지휘관이 적보다 무섭다


마지막 실점도 그 맥락에서 터졌다. 이강인이 내려와서 박용우와 수비라인을 구축해야만 했지만 상대 좌측 풀백 뒤에서 공을 기다렸다. 이강인에게 부여된 수비적 역할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손흥민도 마찬가지다.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황희찬과 위치가 겹쳤다. 때마침 공격권이 넘어간 상황. 결국 황희찬이 중앙을 수비하러 부랴부랴 뛰어갔다. 설상가상으로 박용우는 어정쩡한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센터백이 공격수를 저지하기 위해 뛰어나갔다. 그렇게 열린 공간으로 패스가 통과했고, 침투한 측면 공격수에게 득점을 허용했다.


흔히들 축구팀을 군대에 비유하곤 한다. 규율과 체계가 있고, 약속이 존재해야 하며, 이를 위한 위계가 서야 한다. 주장을 캡틴, 선발 라인업을 스쿼드라 부르는 까닭도 그래서다. 클린스만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수비 문제를 선수들과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감독이 지휘해야 할 부분을 선수들에게 떠넘기는 느낌마저 드는 건 지나친 의심인가. 아, 군대와 축구팀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백 명의 적보다 무능한 지휘관 하나가 더 무섭다는 사실. 이대로면 몰살도 과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시안컵 우승? 이대로면 8강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