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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Apr 10. 2024

한가함을 꿈꾸며 먹는 오차즈케

그린사람: ㅅㅂ


보름 전쯤 치과를 다녀왔다. 몇 주 전부터 양치를 할 때 이가 시려 덜컥 겁이 났다. 서둘러 그다음 주 쉬는 날 치과에 찾아갔다. 예약한 시간에 맞춰 찾아가니 이전 환자의 진료시간이 길어졌다며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환자가 워낙 고령이라 생각보다 시술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됐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에 잡지도 보고 음악도 듣다 보니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렇게 사전 예약을 하고도 장장 한 시간을 더 기다린 뒤에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입 속을 여기저기 들여다보더니 '별 문제는 없네요'라고 말했다. 왼쪽 어금니가 마모돼 이가 시린 건데, 때우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으니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다. 온 김에 스케일링까지 받고 가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입을 벌린 채 “예”하고 대답했다. 반년 동안 쌓인 치석을 다 제거하고 치과를 나서니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저녁에는 몇 년 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다음 주 휴일에는 신분증을 재발급받고 마트에서 장을 본 다음 방 청소를 하고 중고서적에 가 다 읽은 책들을 처분했다. 방청소만큼은 미루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아내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을 게 뻔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난 몇 주째 해야만 하는 일들로만 휴일을 채웠다. 일을 시작하고서부터는 하고 싶은 일들을 하려면 늘 선택이 필요했다. 미련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성격이라 차마 나머지 하나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어 최대한 시간을 쪼개 쓴다. 새로 산 책은 30페이지만 읽고, 한가롭게 침대에 누워서 보기로 한 영화 두 편은 한 편으로 줄이는 식이다. 해서 메모장에는 늘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것들이 어지럽게 뒤섞여있다.      


오늘은 쉬는 날인데도 오후 4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다. 계획한 일이 뭐든 남은 시간 안에 한꺼번에 해내는 건 무리다. 몰래 냉면을 먹으러 가는 건 다음으로 미뤘다. 대신 집에서 아내와 영화 한 편을 봤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토마토와 두부가 있었다. 그것들을 밥과 함께 반찬삼아 먹었다. 결국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자정쯤 되자 잠들지 못할 정도로 허기가 찾아왔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친구가 일본에서 사준 오차즈케(お茶漬け) 포장지를 뜯었다. 고명을 올린 밥을 찻물에 말아먹는 음식으로 일본 에도시대 무렵부터 대중화됐다고 그에게 전해 들었다. 노역에 동원된 인부들이 간단히 식사를 때울 수 있도록 고안됐다고 하면서.      


인스턴트 오차즈케에는 건조된 김가루와 가쓰오부시, 깨소금이 과립 형태로 담겨있다. 밥에 올린 뒤 뜨거운 녹찻물을 부으면 끝이다. 집에는 녹차가 없어 그냥 맹물을 끓여 부었다. 엄밀히 말해 녹차에 밥을 만 게 아니니 오유즈케(お湯漬け)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밍밍한 맹물 맛이 싫을 때는 집에서 먹는 볶은 현미를 풀어 넣으면 좋다. 그 위에 푹 익은 김치를 올려 먹으면 딱이다. 이상하게 오차즈케 다른 국물 요리들에 비해 더 빠르게 식는 느낌이다. 결국 먹는 속도도 빨라진다. 오차즈케를 먹는 데 10분 이상 시간을 쓴 적이 없다. 그렇게 먹고 자리에 누우면 해가 뜨겠지. 그러면 또 출근. 그 다음 날도 출근. 


지금과는 달리 군 입대를 앞둔 때에는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했다. 인생에서 가장 시간이 많은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오래간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들과 이른 저녁을 먹고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 그럴 땐 무작정 호수공원에서 지는 해를 쳐다보거나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자유로의 야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시간을 절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걸어서 한 시간쯤 되는 거리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녔다. 지금의 내가 20대 초반의 시간 개념으로 살아가려면 가진 돈이 많아야 할 것이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곧 돈을 주고 그 시간을 샀다는 뜻일 테니까.


그릇을 비우면서, 그때처럼 시간이 남아돈다는 기분을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철이 덜 든 탓인지, 돈이 없어도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언제쯤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용기는 있고?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스스로를 한심해하다 자리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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