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로 Apr 17. 2024

속고 싶은 바나나우유의 거짓말

그린사람: ㅅㅂ

바나나맛 우유에 바나나가 들어있지 않다는 걸 안 게 언제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유 팩 뒤쪽의 성분명을 들여다보고 나서 ‘바나나가 들어있지 않잖아’라고 깨달았던 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렇다고 그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냐,라고 하면 정반대다. 의외로 담담하게 그 진실을 받아들였다. 이후에 그 사실을 겨냥하듯 우유에 진짜 바나나를 넣은 제품들이 하나 둘 출시됐지만, 다른 제품으로 갈아탄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게는 그게 더 맛있으니까.      


보통 바나나맛 우유 하면 대부분 일요일 아침 목욕탕에서 씻고 나와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며 먹던 추억을 떠올리지만, 살면서 목욕탕에 간 적이 손에 꼽기 때문에 탈락! 내게는 록 페스티벌에서 먹는 바나나맛 우유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그중에서도 2017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마셨던 바나나맛 우유가 최고였다. 정확히는 오후 6시 반쯤, 잠시 저녁을 먹으러 근처 상가로 가던 길이었다. 그때 목이 너무 말라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바나나맛 우유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순간 칵스의 대표곡인 <ADCD>가 공연장 밖까지 들려왔는데, 순간 송도 벌판의 노을 지는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보정을 수십 번 한 인스타그램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1인칭 시점을 벗어나 전혀 다른 시점에서 이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게 진짜 현실인가? 현실 치고는 너무 완벽한데? 축제가 끝나고 다시 일하러 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이 모든 게 다 거짓이었으면 싶었다. 사실 어느 게 진짜고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런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는 것. 그것을 온몸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그런 순간을 맞이하기 몇 해 전, 그러니까 기자 지망생이던 시절 스터디 그룹에서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이론들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근대사회가 지속될수록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의 개념이 등장하리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시뮬라시옹은 원본의 복제품, 시뮬라르크는 그 복제품들이 만들어가는 가상의 세계다. 쉽게 말해 원본과 복제품구분려워지면서 어느 것이 진이고 거짓인지 판별할 수 없는 세계가 다가오리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나는 그의 책 『시뮬라르크』을 발제하면서 예시로 바나나맛 우유를 들었다. 현실의 바나나보다 더 바나나 같은 합성착향료의 맛이야말로 시뮬라르크의 정수라 말했던가. 요즘도 바나나를 먹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바나나 우유의 맛과 향을 떠올리고, 현실의 바나나에서는 그만한 향과 맛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서운해지곤 한다.   


왜 현실은 늘 거짓보다 기대 이하일까. 달콤한 거짓이, 진짜보다 더 나은 가짜가 자꾸 끌리는 건 그래서겠지. 오직 진실만 가득찬 세상은 아름답지 않으니까. 달콤한 거짓들로 가득 찬 세상은 어떨까. 그런 세상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다. 누구나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진실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으므로.


어차피 그럴 바에는 달콤한 거짓한번 실컷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멋있어. 잘생겼어. 그 정도면 너도 꽤 훌륭한 사람이지. 타인으로부터 그런 거짓말이 듣고 싶을 때면 샤워가 끝난 뒤 냉장고에 잠시 넣어 둔 바나나 우유를 마신다. 언제 먹어도 거짓말 같은 맛이다.

이전 06화 한가함을 꿈꾸며 먹는 오차즈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