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로 May 01. 2024

고양이 옆에서 먹는 밀크쉐이크


퇴근하면 이따금 만나는 고양이가 있다. 회색 털을 가진 녀석인데 가끔씩 조명이 들지 않는 아파트 앞 화단에 앉아서 나를 부른다. 정말 나를 찾는 건지 그냥 지나가는 사람마다 부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그 목소리에 반응했을 뿐이고, 이제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됐다.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고, 이내 친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 예전부터 종종 내 눈에 띄었다. 아주 이따금 화단에서 앞발을 모은 채 눈만 깜빡이는 걸 여러 번 봤다. 그 모습이 예뻐서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어차피 대부분의 고양이들은 다가가는 순간 거리를 둘 테니 괜히 다가갔다 머쓱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냥!” 하고 말을 건 날이 있었고,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야옹!”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쟤한테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때 녀석이 내 발 밑까지 와서 드러누웠다. 손을 뻗어 등을 쓰다듬는데 계속 녀석이 뭔가를 말했다. 밥을 달라는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의 표정 안에 들어 있는 생각들을 읽어보려 했지만 어느 것 하나 단정할 수 없었다. 그저 고양이는 끊임없이 말했고, 나는 되지도 않는 맞장구를 쳐주며 그의 말을 들었다. 털 상태는 매끈했고, 피부상태도 양호했으며, 귀 한쪽 끝이 잘려있었다. 그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길에서 태어난 것 같지는 않다. 다행히 다른 고양이들에게 나눠줬던 짜 먹는 간식 몇 개가 가방에 있었다. 남은 것들 중 하나를 꺼내서 먹였다. 간식을 다 먹이고 집으로 가려는데, 녀석이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내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봤다. 영영 집에 못 갈 거 같아 눈을 질끈 감고 도망치듯 뛰었다.

     

그러다 어제 퇴근길에 녀석을 만났다. 늘 그렇듯 화단에서 앞발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다가와서 몸을 비비고 드러눕는 걸 보니 특별히 별 일은 없었구나 싶었다. 여전히 몸은 깔끔히 정돈돼 있다. 달달한 향도 살짝 느껴지는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외출냥’인가. 집에서 키우는 몇몇 고양이들이 주기적으로 밖을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조금 걱정이 들었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라는데, 이렇게 쏘다녀도 되는 건가. 엄청 곱게 자란 것 같은데. 집이 행복하지 않은 건가. 내가 알 수도 어쩔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주는 일뿐. 가방을 열어 공책을 찢은 뒤 종이 위에 고양이 간식 '참치맛 츄르'를 짰다. 배가 고픈 듯 보여 두 개를 한꺼번에 짜줬다.      


나는 옆에 앉아 밀크셰이크를 마셨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단 게 먹고 싶어 패스트푸드점에서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를 사 왔었다. 감자튀김에 밀크셰이크를 찍어먹는 걸 좋아해 이따금 사 오곤 한다. 감자튀김도 같이 먹고 싶었지만 고양이가 달라고 할까 봐 밀크셰이크만 빨아 마셨다. 어쨌거나 고양이랑 함께 뭔가를 먹고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간식 맛이 괜찮았는지 다 먹고 나서도 녀석이 계속 말을 걸었다. 하도 말이 많기에 이번엔 내가 먼저 녀석에게 물어봤다. “사는 게 막막하지 않니?”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니?” 그가 열심히 뭔가를 말했다. “야~옹!”과 “냥!”의 차이를 추측해보지만 전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만족한 표정만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인간인 내게 고양이들은 늘 삶의 막막함 앞에서 의연해 보인다. 삶이 서러워서 운다거나,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한심해 한다거나, 밤늦게 먹을 과자와 밀크셰이크를 생각하며 남은 하루를 버티는 고양이는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고양이들에게 삶은 그저 삶인 걸까. 고양이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견디며 살까. 그 어떤 의미도 연민도 없이 삶은 그저 삶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삶의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녀석의 말 중에 분명 답이 있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길이 없다.

이전 08화 과잉공급 시대의 200mL 흰우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