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면 이따금 만나는 고양이가 있다. 회색 털을 가진 녀석인데 가끔씩 조명이 들지 않는 아파트 앞 화단에 앉아서 나를 부른다. 정말 나를 찾는 건지 그냥 지나가는 사람마다 부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그 목소리에 반응했을 뿐이고, 이제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됐다.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고, 이내 친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 예전부터 종종 내 눈에 띄었다. 아주 이따금 화단에서 앞발을 모은 채 눈만 깜빡이는 걸 여러 번 봤다. 그 모습이 예뻐서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어차피 대부분의 고양이들은 다가가는 순간 거리를 둘 테니 괜히 다가갔다 머쓱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냥!” 하고 말을 건 날이 있었고,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야옹!”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쟤한테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때 녀석이 내 발 밑까지 와서 드러누웠다. 손을 뻗어 등을 쓰다듬는데 계속 녀석이 뭔가를 말했다. 밥을 달라는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의 표정 안에 들어 있는 생각들을 읽어보려 했지만 어느 것 하나 단정할 수 없었다. 그저 고양이는 끊임없이 말했고, 나는 되지도 않는 맞장구를 쳐주며 그의 말을 들었다. 털 상태는 매끈했고, 피부상태도 양호했으며, 귀 한쪽 끝이 잘려있었다. 그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길에서 태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 다른 고양이들에게 나눠줬던 짜 먹는 간식 몇 개가 가방에 있었다. 남은 것들 중 하나를 꺼내서 먹였다. 간식을 다 먹이고 집으로 가려는데, 녀석이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내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봤다. 영영 집에 못 갈 거 같아 눈을 질끈 감고 도망치듯 뛰었다.
그러다 어제 퇴근길에 녀석을 만났다. 늘 그렇듯 화단에서 앞발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다가와서 몸을 비비고 드러눕는 걸 보니 특별히 별 일은 없었구나 싶었다. 여전히 몸은 깔끔히 정돈돼 있다. 달달한 향도 살짝 느껴지는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외출냥’인가. 집에서 키우는 몇몇 고양이들이 주기적으로 밖을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조금 걱정이 들었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라는데, 이렇게 쏘다녀도 되는 건가. 엄청 곱게 자란 것 같은데. 집이 행복하지 않은 건가. 내가 알 수도 어쩔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주는 일뿐. 가방을 열어 공책을 찢은 뒤 종이 위에 고양이 간식 '참치맛 츄르'를 짰다. 배가 고픈 듯 보여 두 개를 한꺼번에 짜줬다.
나는 옆에 앉아 밀크셰이크를 마셨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단 게 먹고 싶어 패스트푸드점에서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를 사 왔었다. 감자튀김에 밀크셰이크를 찍어먹는 걸 좋아해 이따금 사 오곤 한다. 감자튀김도 같이 먹고 싶었지만 고양이가 달라고 할까 봐 밀크셰이크만 빨아 마셨다. 어쨌거나 고양이랑 함께 뭔가를 먹고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간식 맛이 괜찮았는지 다 먹고 나서도 녀석이 계속 말을 걸었다. 하도 말이 많기에 이번엔 내가 먼저 녀석에게 물어봤다. “사는 게 막막하지 않니?”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니?” 그가 열심히 뭔가를 말했다. “야~옹!”과 “냥!”의 차이를 추측해보지만 전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만족한 표정만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인간인 내게 고양이들은 늘 삶의 막막함 앞에서 의연해 보인다. 삶이 서러워서 운다거나,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한심해한다거나, 밤늦게 먹을 과자와 밀크셰이크를 생각하며 남은 하루를 버티는 고양이는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고양이들에게 삶은 그저 삶인 걸까. 고양이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견디며 살까. 그 어떤 의미도 연민도 없이 삶은 그저 삶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삶의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녀석의 말 중에 분명 답이 있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