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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y 15. 2024

영원을 바라는 전투식량

그린사람: ㅅㅂ


유튜브를 서핑하다 우연히 2차 대전 당시 미군 전투식량을 꺼내서 먹는 남자의 채널을 봤다. 테이블에 놓인 원통형 황동 캔에는 ‘March 1943, US Army Field Ration C Dinner B Unit’이라고 쓰여 있었다. 1943년 3월에 생산된 전투식량이라니. 저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거지? B 유닛은 또 뭐야? 설명을 들어보니 당시 미군 전투식량은 B 유닛과 M 유닛으로 나눠져 있다고 했다. B 유닛은 빵이나 시리얼 종류 위주의 구성으로 짜여 있고, M 유닛은 고열량의 육류 요리로만 이뤄져 있다.


남자가 캔을 여기저기 돌려보며 여러 설명을 하더니 이내 뚜껑을 열었다. B 유닛이라는 설명에 맞게 안에는 비스킷, 잼, 과일 맛 사탕, 담배, 분말 형태의 오렌지주스와 코코아 파우더가 들어 있었다. 남자는 들뜬 말투로 캔 안의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들어 살펴봤다. 사탕은 종이에 들러붙어 쩍쩍 소리가 났고, 밀봉된 잼은 석유처럼 검게 굳어 있었다.


검색해보니 영상 속 전투식량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시에 병사들이 먹던 전투식량을 전문적으로 재현하는 업체가 있단다. 갑자기 시시해졌다. 아무리 똑같이 제품을 재현한들 그 안에 1943년의 긴박함이나 치열함 같은 건 담겨 있지 않다. 아니, 사실 그것이 실제로 7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과거는 이미 지나버린 유통기한과 함께 변질됐다. 아무리 진공상태로 밀봉하고 방부제를 뿌려대도 과거를 온전히 보존할 순 없는 것이었다.     


순간 얼마 전에 읽은 김연수의 단편 소설 『사랑의 단상』의 앞부분이 떠올랐다. 주인공인 지훈은 집에서 계좌 보안카드를 찾다 우연히 서랍에서 과거의 연인 리나가 준 에스프레소 캡슐을 발견한다. 제조일자는 2011년 2월 11일. 제대로 맛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2012년 1월 31까지. 그 소설의 배경은 2015년이었으므로 그대로 커피를 내려 마신다면, 분명 이상한 맛이 날 게 분명했다. 그때 지훈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마셔봐야 하지 않을까? 그 캡슐 안에 2011년 봄의 맛이 담겨 있다면.” 물론 그 2011년 봄은 리나를 만나 사랑하던 시절이다. 그 커피의 맛이 어땠는지 아닌지는 결국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안 봐도 안다. 그 안에 2011년 봄의 맛은 없으리라는 걸.      


대개의 경우 음식과 시간은 상극이다. 몇 가지 발효식품을 빼면 다른 공산품에 비해 보존 기간이 현격히 짧다. 어떤 용도건 음식의 본질은 결국 변질과 소멸을 의미한다. 오로지 간직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음식은 없다. 모든 음식은 두 가지의 운명만을 타고난다. 상하거나, 그전에 씹어 삼키거나. 그 어떤 경우도 간직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의미에서 전투식량은 음식이 가진 본질의 정 반대편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구성원 모두 소비하기를 원치 않는다. 둘째, 영영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 보존해놓은 음식이다. 맛? 건강?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까.


해서 몇 달 전 미군 전투식량을 충동구매한 건, 근래 내가 한 선택들 중 최악이었다. 남대문 시장 지하에 미국산 수입품만 취급하는 매장들이 늘어선 곳을 돌아다니다 처음 보는 미군 전투식량이 신기해 그 자리에서 사버렸다. 집에 와 검색해보니 현재의 미군 전투식량은 총 24가지의 메뉴가 있다고 했다. 내가 산 건 그중에서 16번이었다. 메인 메뉴는 치킨 파지타와 토르티아. 그 어디에도 유효기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발열팩에 넣고 데운 뒤 봉지를 뜯어 맛을 봤다. 치킨 파지타의 매운맛 속에서 알 듯 말 듯한 비닐의 맛이 느껴졌다. 보존제인가. 함께 첨부된 토르티아랑 싸서 먹으니 곡물로 만든 전병에서 왜 시큼한 맛이 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멕시코 사람들은 미군들이 자기네 음식을 이렇게 취급하는지 알고는 있을까 궁금해졌다. 결국 더 먹지 못했다. 끝까지 먹다가는 내 몸까지 방부제 처리가 될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시간의 흐름을 억지로 붙잡은 대가 같았다.


그래서일 것이다. 2011년 생산된 에스프레소에서 풋풋했던 시절의 사랑을 떠올리는 게 부질없는 이유는. 만든 지 70년 된 비스킷을 맛보려는 행동 또한. 그 시절의 어떤 순간도 지금 이 세상에는 오롯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과거의 흔적일 뿐, 과거 그 자체는 아닐 테니. 낙엽이 지는 가을에 유독 뭔가가 먹고 싶은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세월에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 이미 흘러간 것들을 보며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그 흐름을 억지로 막아 세우면 어떻게 되냐고? 그럴 때는 미군 전투식량을 한 번 먹어보길 권한다. 이왕이면 내가 먹은 16번 메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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