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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y 29. 2024

기꺼이 바보가 되길 바라며 먹는 스파게티

그린사람: ㅅㅂ

집에 돌아와 스파게티를 해 먹을 때면 가끔씩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다 낡은 주방. 빨래 삶는 큰 냄비에서 끓고 있는 완숙 토마토와 통마늘. 온 집을 다 뒤덮은 습기.      


엄마가 간 돼지고기를 후추와 월계수 잎을 넣어 볶은 뒤 냄비에 넣는다. 바로 옆에 큰 냄비가 하나 더 있다. 넷이 먹을 스파게티 면이 그 안에서 끓고 있다. 잔뜩 삶을 면을 체에 담아낸 뒤 옆 냄비에 넣었다. 이제 다 된 건가 싶었는데, 엄마는 큰 국자로 몇 분 동안 냄비를 젓고 또 저었다. 


처음엔 그게 스파게티인 줄도 몰랐다가 엄마의 얘기를 듣고 알게 됐다. 주제에 들은 건 많아서인지 기대한 만큼 대단해 보이진 않았다. 분명 스파게티는 포크로 먹는 건데 젓가락질이라니. 이렇게 흥건하게 국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렇게 곰탕 끓이듯이 끓여도 되나.      


그렇게 허영심으로 가득한 찜찜함을 갖고 인생 최초의 스파게티를 먹었다. 솔직히 맛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상가에서 하던 옷가게가 망한 뒤, 아버지는 친구네 돼지농장에서 일을 돕고, 엄마는 골프채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 


두 사람은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진지하게 새로운 사업 계획을 세웠다. 기억하기로는 배달하는 사람이 손님의 생일 이벤트를 열어준다는 황당무계한 아이디어도 오갔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이 음식이 스파게티라니. 도대체 이걸 어떻게 판다는 거지? 누가 봐도 이걸 스파게티로 생각할 것 같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스파게티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며 윗집과 옆집에 한 그릇씩 담아 나눠줬다. 습기로 천장 벽지가 다 떨어져 나간 집에서 국물이 흥건한 면을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식구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창피했다. 


굉장한 실행력의 두 사람은 이듬해 실제로 피자 체인점을 열었다. 배달만 하는 열 평 남짓의 작은 가게였다. 사이드 메뉴에 미트소스 스파게티가 있었는데 소스는 본사에서 제공해 준 것을 썼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때 먹은 스파게티를 손님들에게 선보일 기회는 없었다. 감사하게도 장사가 괜찮았다. 그때 번 돈으로 빚을 갚고 새 집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 내가 먹은 스파게티가 전혀 황당한 요리가 아니라는 걸, 최근에 빌 버포드의 <앗! 뜨거워>라는 책에서 보게 되었다. 파스타가 이탈리아 면의 총칭이듯, 라구는 고기를 넣고 끓인 미트소스 모두를 뜻한다고 했다. 흔히들 아는 볼로네제는 라구 소스의 한 종류다. 집집마다 레시피가 다르다니까 우리가 그때 먹은 것도 넓게 보면 라구 파스타의 일종일 것이다. 꽤 오랜 시간 요리하는 것도, 그만큼 정성이 들어간 것도 그때 내가 먹던 스파게티와 다를 게 없었다. 


책을 보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보통은 마늘에 토마토 몇 알을 대충 넣어 먹지만, 그날따라 그 시절 먹던 스파게티가 떠올라 괜히 다르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인 뒤, 냉동실에 남아있는 간 소고기를 대충 녹여 약한 불에 볶았다. 수분이 나오기 시작할 때 소금과 후추를 넣었다. 여기서 너무 익히면 고기가 퍽퍽할 거 같아 스파게티를 익힐 때 쓴 면수를 살짝 부었다. 여기에 토마토 페이스트와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월계수 잎 한 장을 넣고 끓이다 면을 넣어 프라이팬에 굴렸다. 


책을 보니 라구 소스는 두 종(種) 이상의 고기로, 세 가지 이상의 부위를 이용해 만드는 게 기본이라고 쓰여 있지만 시간이 많지 않으니 생략. 다만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를 애매한 상태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하니 파마산 대신 피자 치즈를 한 움큼 넣고 뒤적여 농도를 맞췄다. 상을 펴고 엄마와 같이 스파게티를 먹다 물었다.


 “엄마, 우리 피자집 차리기 전에 스파게티 만들어 보겠다면서 빨래 삶는 통에다 잔뜩 만들었던 거 기억나?”

“내가?”

“너무 많이 끓였다고 옆집 윗집 다 나눠주고 그랬는데.”

“내가 그랬다고?”

“응, 그때 내가 스파게티는 원래 이런 음식이 아니라고 막 뭐라 했었는데. 내가 말해놓고도 미안해서인지 자꾸 기억나더라고. 솔직히 진짜 맛있었는데. 진심.”


엄마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포크로 면을 감았다. 나는 굳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릇이 깨끗이 비워져 기분이 좋았다.       


가끔 내 체면이 앞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못된 버릇이 도진다. 가족이나 애인의 부족한 면을 생면부지의 타인이 보고 있다고 느낄 때,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 나는 그 일과 무관한 것처럼 회피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곤 한다.


스파게티가 국 같든 죽 같든 아무렴 어떨까. 젓가락으로 먹든 숟가락으로 먹든 남들의 시선이 무슨 상관일까. 다 떨어진 벽지 아래서 어설픈 사업 구상을 하며 먹는다 한들. 설사 이탈리아에서 그렇게 먹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라구 소스 스파게티를 만들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기꺼이 바보가 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요즘엔 그 다짐을 핑계 삼아 더 자주 해 먹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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