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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Jun 05. 2024

이름 밖의 모히또

그린사람: ㅅㅂ

몇 해 전, 전주 여행을 하던 때였다. 늦은 밤 시장에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작은 바가 눈에 들어왔다. 칵테일 한 잔에 순댓국이라니. 좋은 조합이군! 가게 한편엔 조용히 술을 마시고 가는 가게로 기억되고 싶다는 주인의 짤막한 글이 붙어 있었다. 그 바람만큼이나 차분한 문장.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독특한 문구처럼 가게 내부가 다른 곳들과 많이 달랐다. 유난히 밝은 조명에 음악도 흐르지 않았다. 술을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드라마 <심야식당>에 더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짧은 머리를 한 작은 체구의 사장님이 조용히 우리를 맞았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이 바에는 메뉴판이 없으며 자신이 즐겨 마시는 술을 규정된 단어가 아니라 재료와 맛으로 묘사해 달라고 말했다. 손님이 묘사한 맛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캌테일을 만들어주는 게 이 가게의 룰이었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고되게 일한 날 마실만한 칵테일을 주세요”라거나 “새콤한 과즙이 들어간 칵테일을 추천받고 싶어요”라고 하는 식이다.


이해는 했으나 쉽지 않았다. 1초 전에 설명을 들었는데도 "모히또 주실래요?"라고 하다 그 맛을 다시 기억해 묘사해 달라는 사장님의 요청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들을 기분이나 말로서 묘사할 때 미각이 살아나요"라고 사장님은 말했다. 잠깐 동안 속으로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제야 간신히 “경쾌하고 산뜻한 라임 향의 술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술은 분명 모히또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모히또라고 규정하기에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평소에 먹던 것보다 보드카의 향이 더 강했다. 탄산은 거의 느껴지지 않은 채로 얼음이 들어가서인지 차라리 온 더 락 보드카에 더 가까웠다.


마셔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라임의 산미가 강하게 느껴져 거부감이 덜했다. 먹어온 것과 달라 어색했지만 분명 나름의 맛이 있었기에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살짝 으깬 라임이어서 그런지 시간이 지날수록 향은 더 진해졌다. 사장님은 내가 마시고 있는 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음식에 비해 술은 좀 더 자유로운 조합이 가능하다고 했다. 너무 규정된 단어에 연연하면 새로운 맛을 찾을 가능성을 잃게 된다고 덧붙이면서.     


가끔 그때의 느낌을 살려 직접 마실 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라임 대신 레몬이나 집에서 만든 오미자청을 넣기도 한다. 강한 탄산이 생각날 때는 사이다를 살짝 섞는다. 강한 신맛이 생각날 때는 얼음을 잔뜩 넣은 토닉워터에 레몬과 라임을 동시에 넣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 ‘라임이 없어서 이번 모히또는 망했다’라는 식의 좌절은 겪지 않는다.


그때 느낀 묘한 해방감 때문인지 그렇게 만든 것들을 텀블러에 담아 밖에서 마시기도 한다. 6월 초, 놀이터 벤치에 심긴 라일락 냄새를 맡으며 마셔도 좋고, 나만 아는 장소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마셔도 좋다. 딱 여름 때까지의 일이다. 다시 날이 추워지면 술은 입에 대지 않는다.    


어쨌거나 지금은 여름이고, 일이 고된 만큼 마실 때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하루를 버틴다. 마시면서 그때 작은 바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생각한다. 그때 내가 마시고 싶은 술을 말로 풀어내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모히또는 모히또로만 존재했겠지. 다른 레시피를 쓸 생각도,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를 내 마음대로 섞어 마실 시도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상의 많은 선택이 단어를 통해 이뤄진다. 이제껏 내가 원하는 것을 단어가 아닌 말로 풀어낸 적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타인의 제안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지내왔던 건 아닐까? 요즘에는 내가 만든 것들을 홀짝대면서 이제껏 되고 싶었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말로 풀어내 보려 한다. 생각보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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