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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y 22. 2024

옥상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조차

그린사람: ㅅㅂ


작년 겨울부터 애인*이 사는 오피스텔 바로 옆에 새로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착공 두 달 만에 철골 구조가 다 세워졌다. 며칠 전 애인이랑 밥을 먹고 있는데, 창밖에서 부지런히 철근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뭐 대단한 풍경도 아닌데 싶다가도, 괜한 민망함에 서둘러 커튼을 쳤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사 갈 때가 된 건가. 아니, 그것도 다 돈인데. 일단 사생활 방지 필름이라도 하나 사줘야 하나. 애인에게 물었다. “너 알고 있었어?” “응, 10층짜리더라” 건물이 완공되면 채광을 위해 커튼을 걷는 순간 옆 건물에서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게 뻔했다.      


그날 이후로 집을 나설 때마다 공사가 얼마나 진척됐는지 매번 살폈다. 시멘트 반죽을 실은 레미콘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니 콘크리트 타설이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았다. 얼마 뒤 2층 주민 중 한 사람이 건축주와 시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 생각이라며 승강기 거울 면에 자신의 연락처를 붙여 놓았다.


전화를 걸어봐야 할까. 내 임의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 애인에게 뜻을 물었다. “소유주도 아니고 월세 사는데 그렇게까지 해 봐야 의미가 있어?” 애인은 이미 이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집주인의 간섭도 없고 안전하고 깨끗한 집이었는데, 이런 일로 이사를 가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이 집에 살기 전, 평생을 가족들과 한 집에서 살아온 애인은 나와 전화할 때마다 독립하고 싶다며 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에는 두려운 게 많은 듯했다. 나야 자취 경험이 있었기에 크게 어려울 게 없다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애인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미적거리곤 했다.


결국 결정을 망설이던 애인을 데리고 무작정 공인중개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방을 둘러본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다 썼다. 이제야 용기가 생겼는지 그제야 애인이 적극적으로 집의 구조와 환경에 대해 따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열 군데가 넘는 집들을 돌아본 끝에 지금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렇게 이곳에서 산 지 3년째다. 그녀가 일상을 꾸려온 시간들과 더불어 내가 이곳에 드나든 흔적들이 집 구석구석마다 스며있다. 칫솔과 면도기. 생일선물로 준 베이킹 도구와 실바니안 패밀리 인형들. 집에 가져가지 않은 내 옷가지. 언젠가는 그 모든 흔적들이 다 한 짐에 싸여 어딘가로 옮겨질 것이다.


애인은 그 짐들이 여러 집들을 들르고 들러 언젠가는 시골의 한적한 단독주택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면 한다고 말하곤 했다. 둘이서 쌓아올린 세계가 타인의 욕심 때문에 휘청대지 않는 곳. 오직 단 둘만의 의지로 살아가지만 완전히 고립되지는 않은 곳.


바람대로 될 수 있을까. 가끔 서울 땅이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다 쓴 물감을 버리던 양동이처럼 느껴지곤 한다. 수많은 색들의 물감이 버려지고 버려져 결국 회색빛의 물이 되어버리곤 했던. 각자의 꿈과 욕심과 의지가 섞이고 섞여 흐릿해진 저마다의 미래가 이 도시의 색깔은 아닌가.      


늦은 밤, 이따금 재미로 옥상에서 컵라면을 먹곤 한다.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을 아슬아슬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 남쪽의 주택가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보다 보면 이곳에서의 야경도 꽤 괜찮다. 애인과 함께 컵라면을 먹을 때면 이 많은 집들 중에 그래도 우리가 온전히 살 집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뻔한 청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얘기들을 주고받곤 했다.


오늘도 옥상 위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기분전환이나 할까 싶어 올라갔는데, 이제는 높게 쌓아 올린 철근 때문에 서울 남쪽의 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다. 둘이 말없이 젓가락질을 하면서 그나마 보이는 북쪽 산자락 아래의 집들을 내려다봤다.




*2016년 무렵에 쓴 글입니다. 글에 적시된 애인은 구여친(현 우리집 대장)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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