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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y 08. 2024

손님은 알 수 없는 에스나프 피자

그린사람: ㅅㅂ



에스나프(Esnaf)라는 단어가 있다. 터키어로 주변 상인들이 찾는 가게나 또는 그러한 문화를 말한다. 주변 상인들이 서로의 가게를 이용하면서 조금씩 서비스를 더 얹어주거나 또는 공짜로 자신의 것을 나눠주는 식이다. 17세기 오스만 제국 술탄에 반기를 들던 이스탄불의 상공인 조합(Guild)들이 남긴 흔적이다. 


16세기 중엽 아나톨리아에서 오랜 시간 반란과 전쟁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인근의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장사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경쟁보다 함께 뭉치는 게 효과적이었다조합이 커질수록 영향력도 함께 커졌다. 정치세력화의 시작이다. 과중한 세금과 오랜 시간 이어진 전쟁으로 민심을 잃은 술탄 무스타파 2세를 반란(에디르네 사건, 1703)으로 끌어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이들이었다.


흔히들 장사하면 적대적 경쟁이나 담합을 먼저 떠올리지만 소상공인들에게도 느슨한 연대감은 존재한다. 어느 상권이든 서로 느슨하게 의존할 때 더 오래 지속된다. 단언컨대 세계 어디에서나. 노동자에게 국경이 없듯 장사도 마찬가지다. 그게 누구든, 어디에서 뭘 하며 살든 결국 뭔가를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이 과정이 그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일뿐이라면 시장이란 공간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터키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이를테면 돈가스를 파는 우리 가게에서 점심에 제육볶음을 해 먹기 위해 대형마트 대신 바로 옆 정육점을 찾는 식이다. 그러면 정육점 사모님이 계산을 치르면서 “밥 다 먹고 우리 가게에 등심 돈가스 두 개만 가져다 달라”라고 얘기한다. 또는 사모님 아들이 우리 가게서 밥을 먹을 때 서비스로 콜라를 줄 수도 있다. 일종의 한국식 에스나프다.  


내가 일상에서 체험하는 가장 비싼 에스나프는 피자다. 우리 가족이 피자집을 하던 시절 배달을 하던 동생이 지금도 다른 가게에서 배달을 한다. 물론 사장님과도 잘 아는 사이고. 가끔 배달에 착오가 생겨서 오갈 데 없는 피자를 우리에게 가져올 때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끼리는 '펑크 났다' 표현한다. 손해가 생겨서 얼마나 속이 쓰리겠냐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받을지 말지 머뭇대는 사이 피자는 식어간다. 우리가 생각나 찾아온 그 성의를 생각하면 맛있게 먹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저번 달에도 그랬다. 이번에 펑크 난 피자는 무려 3만 2천 원짜리 치즈 앤 그릴드 비프. 무려 돈가스 네 개 값이다. “야, 이거 정말 먹어도 돼?” “어차피 다른 데 나갈 수 없는 메뉴라서.” 그가 헬멧을 고쳐 쓰며 돈가스 먹고 싶을 때 찾아와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그가 가자마자 서둘러 창고로 달려가 피자 박스를 열었다. 훈김이 한 겨울 온천처럼 피어올랐다. 


“이거 막 만든 건데?” 


상태를 보니 집 근처에도 가지 못한 피자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배달이 취소된 이유를 물어보지 않은 게 떠올랐다. 할 수 없이 저마다 배달이 펑크 난 이유를 추측하며 가족들과 피자를 나눠먹었다. 맛있다. 맛있는데 미안하다. 맛있다와 미안하다는 말이 한 문장에 섞이니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돈가스 먹으러 온다는 인간이 통 소식이 없어서 안부도 물을 겸 주문전화를 넣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슈퍼 슈프림 피자 라지 사이즈로 하나 포장해주세요. 가지러 갈게요. 참, 치즈 크러스트로!” 가게 일을 마무리하고 피자를 찾으러 갔다. 정작 주인공은 보이지 않고 사장님이 우리를 맞았다. 하필 오늘이 그놈 쉬는 날이란다. 그때 피자 잘 먹었다고 사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돈가스 드시러 오라는 말도 같이 덧붙이면서. 


문을 나설 때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치즈 좋아하는 거 같아서 더 올려줬어요!” 집에 가서 박스를 열어보니 치즈가 피자 바깥으로 흘러 넘칠 지경이었다. 줄줄 흐르는 치즈를 보며 나의 식욕도 선을 넘었다. 근래 먹은 피자 중 단연 최고였다. 치즈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구나. 그러나 넘치도록 얹은 치즈가 피자 맛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장사하는 우리는 안다. 에스나프의 맛은 달다. 그 어떤 손님도 경험할 수 없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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