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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Apr 24. 2024

과잉공급 시대의 200mL 흰우유


구직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상한 면접관을 만나기 마련이다. 무슨 이유인지 절실하게 면접에 임할수록 면접관들이 이상한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나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다. 어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보였던 걸까. 한 번은 턱이 작은 걸 보니 말년이 안 좋겠다는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었다.


다른 한 번은 20대들은 자신들이 짜 놓은 이론에 갇혀서 산다며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을 풀더니, 질문다운 질문도 안 하고 그냥 돌려보낸 적도 있다(무려 1대 1 면접이었다). 모두 지자체에서 하는 취업성공 패키지 교육을 받을 때 알선받은 업체들에게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담당자는 동성애 혐오 동영상을 메시지로 보내면서 관련 단체에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보내 달라고 졸라댔다.      


모두가 사는 게 녹록지 않다고들 버릇처럼 말하던데, 저들이 살아가는 걸 보니 모두가 그런 건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런 질문에 저런 메시지를 보내는 이들이 먹고사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걸 보면. 그들에 비해 열심히 사는 나는 왜 이모양인가.


그 원인이 뭘까 꽤 오랜 시간 고민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게 다 공급과잉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980년대에는 매년 약 70만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보다 정확히 두 배 많다. 그 아이들의 80%가 성인이 되어 대학에 진학했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취업시장에 영향을 주던 시기이기도 했다. 해서 문과생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수요보다 매년 10만 명 이상 더 배출됐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과잉 생산된 제품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남아도는 세계에서의 삶이란 어떤 의미일까? 균형이 맞지 않는 수요와 공급 사이에선 필연적으로 권력관계가 성립한다. 수요가 공급을 압도할 때 권력의 추는 파는 자에게 기운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도 사는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주는 대로 사 써야 한다.


반대로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질 때는 사는 쪽이 우위에 선다. 돈만 있다면 뭐든 값싸게 살 수 있다. 문제는 채용시장이다. 거기서 만큼은 기업이 소비자니까. 기업들은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사람들을 싼 값에 골라 뽑을 수 있다. 얼마나 싼지 갑질이 덤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압박면접을 빙자해 구직자의 외모나 나이를 조롱해도 괜찮을 만큼.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말을 손바닥 뒤집듯이 번복해도 상관없을 만큼.


편의점에 가면 가끔 200mL 우유를 하나씩 사 오곤 한다. 팔리지 않아서 폐기될 바에는 차라리 내가 먹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짐작하겠지만 면접에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은 뒤부터 생긴 버릇이다. 실제로 200mL짜리 흰 우유는 언제나 인기가 없다. 바나나우유와 딸기우유가 다 팔려나간 빈자리 옆에 흰 우유는 늘 손도 대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우유를 집으면서 이따금 내 쓸모에 대해 묻곤 한다. 과연 나는 얼마나 쓸모 있는 인간일까. 팔리기 직전, 그리고 폐기되기 직전 그 사이 어딘가가 지금의 내 상태는 아닐까. 돌이켜보면 백수였던 이전에도, 일을 하는 지금도 늘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으면 궁금해진다. 누군가가 덥석 집어가는 상품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소룡은 생전 인터뷰에서 사람을 상품 취급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작금의 세태라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최고의 상품이 돼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과잉 공급의 시대다. 최고의 상품인 이들 또한 과잉 공급되고 있 시대이므로 나는 영원히 그 기분을 모를 것이었다.      





*이소룡 지음, 존 리틀 엮음 (『이소룡 자신감으로 뚫어라』, 인간희극, 2005) 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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