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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지를 연습하자

by 일로

Menu 18. 저항의지를 연습하자


얼마 전 식사시간에 뉴스를 봤다. 가게에서 밥을 먹는 오후 세 시는 모두에게 지루한 시간이다. 그 때문인지 그 시간대 종합편성채널에서는 온갖 선정적인 내용의 소식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번엔 고객이 테이크아웃 커피에 빨대를 같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장님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요구했다는 얘기였다. 고객은 사장님이 무릎을 꿇은 모습을 촬영해 남겼다. 인터뷰 내내 사장은 울고 있었다. 사장님은 현재 해당 고객을 업무방해혐의로 고소한 상태라 했다.


뉴스를 괜히 틀었다 싶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비단 뉴스를 보고 하는 생각은 아니다. 가끔 가게에서 난감한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편이다. 가끔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도 상상한다. 내게 이런 상황이 오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만 말하면, 나는 무릎을 꿇지 않았을 것이다. 사장님이 응당 사과해야 마땅한 일이긴 하다. 스스로 야기한 업무 실책이다. 하지만 무릎을 꿇으라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소비자로서 요구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인간적인 모멸이자 인신공격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에 맞설 수밖에 없다. 내 종업원이 같은 경우에 처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직원들의 인간적 존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늘 자존심과 존엄을 구분한다. 자존심은 언제든 굽힐 수 있다. 세 살짜리 아기에게도 90도 허리를 숙여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존심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의 품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품위 따위야 언제든 내던질 수 있다. 내게 그 무엇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과 결부돼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존엄은 나의 존재에 근거하는 것이다. 업무와는 별개의 영역이다. 내가 유발한 건 그저 고객의 불편함과 불쾌함이지 인간적 모욕이 아니다.


따라서 주문 과정에서 무언가를 빼먹었다는 이유로 무릎을 꿇을 순 없다. 설사 그로 인해 고객이 폭력을 휘두른다거나 가게에 온갖 해코지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나는 마인드 컨트롤로 나의 저항 의지를 훈련한다. 이런 경우가 생길 때 머뭇대지 않기 위해서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호신술을 연습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객과 싸울 때를 가정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니 기가 차는 이들도 있으리라. 허나 내게는 고객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아니,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다. 당신도 높은 확률로 일을 해봤거나 할 사람일 것이고, 모든 직장에는 위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 위계를 무기로 상대의 인간적 자존을 짓밟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위계상 아래에 처한 이들은 여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저항할 경우 잃을 게 많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허나 몇 번 겪고 나니 더 명확해졌다. 돈은 언제든 다시 벌 수 있지만 상처 입은 인간적 존엄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돈으로는 대체 안 되는 것들이란 게 분명 있다. 나의 자존과 존엄이 그렇다.


어떤 경우에도 적을 만들면 안 되는 게 사회생활의 제1 원칙이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맞서야만 하는 경우가 생긴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고 골치 아픈 결과를 예측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좋게좋게 마무리 할 것인가. 결연히 싸워야 할 것인가? 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내게는 그것이 존엄의 결부 여부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다. 자영업자들이 저항의지를 키워야 하는 이유는 무조건적인 굴종이 외식업자들을 ‘을’로 보는 시선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의 지배를 받지만, 반대로 각자의 행동이 모이고 모여 사회의 인식체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우리가 갑질 고객의 일방적인 괴롭힘에 저항하지 않으면, 이렇게 형성된 사회의 인식체계들이 쌓여가며 다른 가게들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옆 나라 일본이다. 올해 봄 일본 도쿄도 의회는 ‘카스하라(고객 갑질)’를 근절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하겠다 발표했다. ‘카스하라’는 영어단어 고객(customer)과 괴롭힘(harassment)의 일본식 발음인 ‘카스타마’와 ‘하라스멘토’의 앞부분을 결합해 만든 단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과 일본의 외식업 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고객 갑질과 괴롭힘들이 벌어지고 있다.


반면 유럽에서는 이런 일들이 좀체 벌어지지 않는다. 똑같은 식당인데도 말이다. 체코에 놀러 간 지인은 주문한 스테이크가 너무 익혀 나와 다시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현지인 친구가 “체코에서 손님은 왕이 아니야”라며 그냥 먹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했단다. 개인 체감의 오류인가 싶다가도, 한국과 일본에서 벌어지는 고객 갑질이 유럽에서는 벌어졌다는 얘기는 좀체 접하기 어렵다. 유럽에도 어딘가에는 분명 친절한 가게가 있을 텐데 말이다.


그 차이는 뭘까?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은 근대화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를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라 표현한 바 있다. 이 사회는 과연 부하직원을, 종업원을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그런 곳이 얼마나 되는가? 그렇다면 왜 이 사회에는 '갑질'이라는 고유명사가 존재하는 걸까? 사실 비 사무직 직군에 대한 선입견과 차별은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 중 하나였다. 갑질이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 또한 2010년대의 일이며, '일상 민주주의'라는 키워드가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 역시 그 무렵이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조차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근대화는 여전히 지체돼 있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정부형태의 변화와 투표권의 쟁취만을 의미했지, 경제적-사회적 위계에 대한 해방과 문제의식으로 번지지 않은 결과다(일본 사회의 갑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일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반면 유럽은 68년 혁명을 기점으로 신분과 계급이 아닌 동등한 관계로서의 인간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흑인민권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기존 좌파정당, 대학사회의 권위적인 의사결정 구조와 부조리한 관행들이 역시 이들에 의해 분쇄됐다. 이런 움직임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를테면 프랑스 대학의 평의회는 학교의 행정 직원부터 청소부까지 모두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구성원 전원이 동등한 투표권을 갖는다. 독일은 5인 이상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들도 노조와 평의회를 조직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 68혁명을 통해 유럽은 비로소 직업의 위계와 역할에서 '사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들은 사회 구성원들이 일상의 상거래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동등한 거래로 인식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여기는 한국이다. 유럽의 현실이 어떻든 내가 장사할 곳은 여기다. 그럼에도 먼 나라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장이 공간의 지배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손님을 환대하는 것은 그것이 주인 된 자의 본분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우리 위에 군림하는 존재라서가 아니다. 한국과 일본처럼 상거래를 위계로 인식하는 사회는, 사장이 가게의 지배력을 손님에게 힘없이 넘겨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결과 몇몇 이들은 외식업자를 약자로 규정하고 의도적인 괴롭힘도 서슴지 않는다. 식당은 통치의 영역이며 당신은 그곳의 주권자다. 주권자가 주권을 포기하는 순간 누군가는 침략자로 돌변해 당신을 위협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 나의 존엄에 상처를 입히는 언사와 요구에 당당히 맞서는 것뿐이다. 매뉴얼을 작성하든 혼자 중얼거리든 저마다 저항의지를 연습해야 하는 이유다. 이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두려운가? 당신의 저항이 정당성을 갖는다면, 단언컨대 그들의 협박으로 가게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평소에 손님들에게 진심이었다면 말이다. 민심을 얻은 가게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정말? 그 집이 그럴 리가 없는데?" "손님이 진상이었겠지, 그 집 하루 이틀 가보나?"라는 반응이 나온다. 당신의 선의를 모두가 알아준다면 그들의 악의적인 컴플레인과 영업방해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이 또한 경험한 바다).


무엇보다 가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자기주장조차 하지 못하겠다면 부디 외식업에 뛰어들지 않기를 권한다. 굳이 타인에게 친절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많다. 그러나 이미 이 길로 뛰어들었다면, 부디 정신 똑바로 차리시라. 나도, 당신도, 돈과 존엄을 맞바꾸는 일은 부디 없기를 바란다. 이게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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