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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는 사적 자치의 영역

by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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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u 17. 가게는 사적 자치의 영역


수만 명의 손님을 상대했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순간이 있다. 가끔 안 치운 자리에 손님이 앉을 때다. 다른 가게에 비해 테이블을 치우는 속도가 느린 편은 아니다. 심지어 빈 테이블이 많은 시간대에도 기어이 안 치운 자리를 고집하는 손님들이 있다. 대개의 경우는 그 자리에서 어떤 이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TV를 보기 편하다든가, 눈치 안 보고 핸드폰을 보면서 ‘혼밥’을 하기 좋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 게 문제 될 건 없다. 왜 안 되겠는가? 사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근원은 그 자리가 다 치워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럴 때는 앉기 전에 나를 불러서 “저기, 여기 앉고 싶은데 좀 치워 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 안 치운 자리에 덥석 앉는 손님들을 보면, 뭐랄까.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지인을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이 역시 손님이 괜찮다면 사실 아무 문제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손님 맞을 준비가 안 된 집에 손님이 덜컥 오는 건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근데 이게 문제인가? 정말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 아닐 수도 있는 상황. 그럼에도 느껴지는 불편함. 당시의 나는 이것이 왜 불편한지 논리적으로 정립되지 않았고, 때문에 혼자만 속으로 앓곤 했다.


그러다 몇 년 전, 내 불편함에 실체가 있음을 깨달았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처음 봤을 때였다. 인테리어 소품 중개상인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가 전국의 맛집을 돌아다니며 홀로 식사를 하는 에피소드를 담은 드라마다. 나는 이 드라마를 시즌 1부터 11까지 전부 본 ‘덕후’다. 모두 실제 있는 가게들을 배경으로 했다. 모두 백 곳이 넘는 식당이 등장했다.


드라마를 보다가 이 식당들 모두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됐다. 자리 안내다. 손님은 문 앞이나 입구에서 잠시 멈춘다. 그리고 직원과 마주하기를 기다린다. 이후 직원이 찾아와 “몇 분이시죠?” 라거나 “혼자 오셨나요?”라고 물어본 뒤 “이쪽에 앉으세요”라며 자리를 안내한다. 바쁘면 바쁜 대로 안내를 하고, 한가하면 한가한 대로 안내를 한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식당마다 안내 방식이 똑같으니 혼란스러웠다. ‘정말 저런다고?’ ‘드라마 설정 아냐?’


그게 드라마적 요소가 아니라 현실의 ‘국룰’ 임을 알게 된 건 여러 번 일본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다. 찾아간 식당마다 이 문화가 규칙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다녀온 싱가포르도 비슷했다. 세상은 넓고 식당은 많으니 분명 안 그런 곳도 있겠다만, 대체적으로 이 규칙에는 예외가 없었다. 캘리포니아에 장기 출장을 다녀온 아내는 “미국 역시 그렇다”며 내 심증에 힘을 실었다.


(재밌게도 LA 코리아타운의 몇몇 한인 식당들은 따로 자리 안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나라들은 가게가 사장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좀 더 강한 거 같던데. 여기는 사장의 영역이고 그가 정한 규칙이 적용되는 곳이라는 거지. 손님이라도 그 영역을 침범하는 건 무례하다고 보는 느낌이랄까.”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 문화는 일종의 예의범절이 아닐까. 실제로 근대화를 일찍 시작한 사회의 공간 개념은 피아가 확실하다. 초대받은 손님이 굳이 현관 앞에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를 묻고, 비행기나 버스 옆자리에 앉을 때 “익스큐스 미”라고 말한다. 약간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로 서로의 영역에 민감하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그들에게 ‘나의 영역’은 오랜 시간에 걸쳐 쟁취한 권리다. 산업화로 인한 도시의 인구밀도 증가와 관련이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에서 묘사하듯 18세기 파리 시민들의 상당수는 좁은 공동 주택에서 여러 세대가 뒤섞여 살아갔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의 영역에 대한 갈증을 권리로서 쟁취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특히나 상업으로 성장한 부르주아 계급은 ‘프라이버시’라는 귀족의 전유물을 자신의 일상에 가져오고자 애썼다. 프라이버시는 흔히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생활로 표현되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국가나 타인의 강제력이 개인의 사적 영역을 침해할 수 없도록 한 권리의 총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1804년 나폴레옹 법전에 ‘사적자치의 원칙’, ‘사유재산권존중의 원칙’, ‘과실책임주의’ 등의 개념이 적시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생활의 불가침성과 자신이 소유한 공간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나의 영역’에 대한 서구의 공간적 배타성은 시민혁명과 인권선언의 결과물이다. 그렇게 지나온 세월이 무려 200년이다.


반면 한국은 근대화의 역사가 짧다. ‘나의 영역’이라는 개념이 권리이자 일상의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체감이 잘 안 된다고? 멀쩡히 사람이 살고 있는데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이유로 새 매입자와 공인중개사가 쳐들어와 당황스러웠던 적, 독립해 살아봤다면 한 번쯤 있을 게다. 1990년대에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에 대한 매너를 초등학교 교과서 <슬기로운 생활>로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집에 초대받았을 때 허락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사람을 팔로 치고 지나가지 말라는 것과, 초면에 ‘애인은 있냐?’ 등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내용도 함께 배웠던 것 같다).


식당에서 사장은 공간을 점유하는 자다. 법률상 그는 사적 자치의 권리를 갖고 있다. 법이 정해준 한계 내에서 자신이 점유한 공간의 룰을 정하고 집행할 수 있다. 바람직한 식당은 손님의 권익 보장과 형평성에 맞게 규칙을 만든다. 손님은 가게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때(사회상규나 신의성실의 의무 위반)를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이를 존중해야 한다. 때로 한국 사회에서는 이 원칙이 너무 쉽게 무시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적용되던 팬데믹 2년 동안 제일 힘들었던 건 “대화 중에는 마스크 착용 부탁 드립니다”라고 했을 때 손님들의 반응이었다.


몇몇 손님들이 그 규칙을 어기고 주변에 피해를 끼칠 때에는 사실상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어떤 소리가 날아올지 알 수 없어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무섭고 싫었다. 문제가 생기면 평점 테러부터 소비자 분쟁, 가맹점 계약해지까지 각오해야 한다. 마스크 착용을 요청한 카페 직원에게 커피를 집어던졌다느니,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6인 이상 입장이 곤란하다고 얘기하자 사장을 위협했다느니 하는 내용의 뉴스가 심심찮게 보도됐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저 등가교환의 상거래일 뿐인데, 왜 세상에는 우리를 몸종 취급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걸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아르바이트를 할까 푸념한 적도 있다. 자영업자나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직 노동자)는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현장 근로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기가 어려운, 사실상 형식적인 법 조항이라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보호장치조차 없다).


진상 손님에게 접시를 던질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게 아니다. ‘노 키즈 존’이나 ‘노 시니어 존’ 같이 손님을 가려 받게 해 달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식당의 책임자가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 공간의 점유자로서 존중받는 문화가 자리 잡기를 바랄 뿐이다. 주권자로서 다수의 손님을 위한 자치를 집행할 수 있을 만큼은.





*제3자의 폭언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발생 등에 대한 사업주의 조치를 명시한 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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