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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스크로 더치페이와 맞서려면

by 일로


Menu 16. 키오스크로 더치페이에 맞서려면


이어지는 키오스크 이야기. 키오스크가 들어온 이후 가장 좋은 건 계산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어르신들이 오면 여전히 직접 주문을 받고 결제까지 해야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획기적인 업무개선이다. 이제 계산을 업무의 일부로 보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 사이에 나는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별 거 아닌듯 하지만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개선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우리 가게는 10대에서 20대 고객이 40%가량 된다. 해당 연령대의 경제적 문화적 특성상 대부분 더치페이를 선호한다. 문제는 이게 시간을 꽤 많이 잡아먹는다. 단말기가 IC칩을 해독하는 데 약 7초가량 소요된다. 점심시간에 네 다섯 명이 카운터에 줄을 서서 더치페이를 요청하면 대략 35~40초가 걸린다. 메뉴가 아니라 원하는 금액을 나눠서 분할 결제할 경우 시간은 더 늘어난다.


(혼자서 매장을 책임질 때를 기준으로) 이러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잔뜩 밀린다. 이미 완성된 음식들이 하나 둘 적체되며 상태가 변하기 시작한다. 메밀국수의 경우 30초만 공기에 노출돼도 떡처럼 붇는다. 실제로 나가지 못한 음식이 식거나 굳어서 다시 해드린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단체로 와서 더치페이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만날 때면 울고 싶었다. 그렇다고 “저기, 저희가 바빠서 그런데 알아서 계좌이체로 결제하시면 안 될까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근데 키오스크가 이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줬다.


키오스크 설치를 마친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때마침 인근 중고등학교의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학생들이 주 고객인 시기다. 테이블 전체를 학생들로 채워질 때도 있다. 더치페이 지옥이 벌어지는 날이라는 뜻이다. 분기마다 겪는 일이지만 이 기간은 늘 두렵다. 밤마다 가게가 엉망진창이 되는 악몽을 꾼다.


그러나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전쟁 준비는 끝났다. 찾아온 점심시간.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0분 만에 테이블이 다 찼다. 자, 와라! 이런 상황에서 나는 더욱 불타오르지, 후후!


그 자신감, 딱 5분 갔다. 당시 수용 인원은 모두 서른여섯 명. 모두 서른네 장의 주문서가 나왔다. 1번 테이블에서 한 장. 9번 테이블에서 한 장. 나중에는 어디서 어떤 주문이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시에 카운터가 마비됐다. 개전 5분 만에 지휘부가 초토화됐다. 예상에 없는 일이었다. 장장 2미터가 넘는 주문서를 하나씩 뜯어서 같은 테이블끼리 묶어보려 했다. 너무 늦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새로운 체제의 수립은 때로 무정부상태와 같다고. 1792년 프랑스 혁명정부가 그랬고, 2023년 이날 우리 가게가 그랬다.


이미 작전은 실패했다. 나는 각개 격파를 시도했다. 1번에 한 그릇. 9번에 한 그릇. 7번이 돈가스였나? 아, 아닌가요? 죄송해요! 메밀국수 시키신 분!


난리였다. 한 명은 식사를 다 했는데, 다른 한 명은 여전히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돈가스 두 개는 결국 주인을 찾지 못했다. 주인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벤트로 주기로 한 초콜릿은 결국 한 개도 주지 못했다(결국 내가 다 먹었다). 학생들이 너무 착해서 클레임은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았다.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불타는 월요일 낮이었다.


마감 후, 학생들이 더치페이 대신 각자 주문을 한 이유를 찾아냈다. 키오스크 업체에서 설계한 UI디자인이 생각보다 복잡했다. 일단 원하는 메뉴를 다 취합한 뒤 주문을 클릭한다. 그다음 ‘더치페이’ 기능을 누른 뒤, 다시 자신이 고른 메뉴를 선택해 결제한다. 둘이면 모를까, 네다섯 명이서 얼굴만 한 키오스크 하나 끼고 더치페이하기엔 꽤나 번거로웠다. UI디자인의 미비점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에는 희생이 따른다. 몸으로 때우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 없다.


하지만 내가 두들겨 맞았다고 해서 당신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그게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다. 학생들이 두 명 이상 무리를 지어서 왔을 때는 전원이 다 주문과 결제를 마쳐야 조리가 시작됨을 미리 공지하자. 그다음은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테이블에 앉은 인원들이 모두 주문을 마친 것을 확인한 뒤 주방에 주문서를 걸자. 당연히 같은 테이블끼리 주문서를 엮어서 주방에 전달해야 한다(나는 스테이플러를 쓴다). 이 고비만 넘기면 서빙이 훨씬 수월해진다. 키오스크는 당신의 일을 충직하게 돕는다. 하지만 당신의 결정까지 대신해주지 않는다. 조율은 언제나 당신의 몫이고, 키오스크와 손발이 맞으려면 약간의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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